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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aj Pensoj2010/01/03 13:46

*이 글은 대략 1년 전에 수강한 우테 구쪼니 교수의 <형이상학의 완성으로서의 헤겔 사유> 세미나의 보고서이다. 보고서를 수정, 보완하여 다시 제출하라는 권고를 받고 최근에 몇 가지 사항을 수정, 보완하여 다시 제출하였다.

헤겔에게서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 테제와 타자성의 문제


서론
헤겔에게서 동일성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대논리학』의 <학의 시원은 무엇으로 마련되어야 하는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동일성이다. 순수 존재와 순수 무는 분명 상이한 것이며 그리하여 동일하지 않은 것이지만, 학의 시원에서 시작하는 순수 존재의 운동이 ‘단적인’ 시작이기 위해서 순수 존재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곧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서의 순수 무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학의 시원에서 말해지는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은 바로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인 것이다. 헤겔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동일성의 또 다른 의미는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이다. 물론 헤겔에게서 존재와 무의 동일성과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은 상호 연관되어 있지만, 본고의 과제가 양자의 연관을 검토하는 것은 아니다. 본고는 헤겔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동일성 중에서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 테제를 중심으로 그것이 갖는 함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헤겔의 동일성 테제에 대한 비판은 아도르노가 『부정변증법』에서 수행했던 비판에 기초한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칸트의 문제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존재와 사유가 동일하다는 주장은 기묘하게 들린다. 존재와 존재자를 날카롭게 구분하지 않는 한국어의 일상적인 용법에서 그러하듯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존재는 분명 우리 인간의 사유 바깥에 현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은 철학적 반성을 통해서 간단히 논파된다. 철학사가 말해주는 것은 주체 바깥의 실재를 논증해보라는 철학적 요구에 대해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논증이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각각의 철학자가 이에 대해서 해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며, 특히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에서는 이 문제를 객체의 객체성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주체의 주체성에 대한 물음을 통해서 해명되게 되었다는 점을 특기할만하다. 사유하는 주체의 외부에 어떤 대상이 실재한다는 점에 대해서, 그 대상의 실재를 우선적으로 주체의 사유에 근거하여 해명하고자 하는 것은 곧 객체의 객체성을 주체의 주체성에 연관시키는 작업이자, 그것의 최극단에서는 객체성을 주체성에로 환원시키는 작업이다. 분명한 것은 철학적 반성에 의하여 객체성과 주체성의 연관, 나아가 주체와 사유의 동일성이라는 문제가 상식적인 시각에서 볼 때와 같은 어떤 넌센스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사유하는 주체에 객체의 객체성을 근거지우는 근대철학의 프로그램은 무엇보다도 객체에 대한 사유가 객체에 대한 주체의 사유라는 것, 그리하여 객체가 우리 주체에 ‘대하여’ 존재한다는 점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객체는 단순히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이 되며, 그리하여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것, 표상되는 것이 된다. 객체와 주체의 이러한 상호관계, 즉 객체의 객체성을 주체의 주체성에 근거지우는 근대철학의 위와 같은 근본적인 구도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도 확인되는데,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대상이 우리 직관능력의 성질을 따르[며](KdrV BⅫ)”,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인식 능력에 바탕한 “경험 일반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경험의 대상들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KdrV B197)”라고 말한다. 물론 칸트가 경험 일반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경험의 대상들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라고 말하더라도, 우리의 인식 능력이 경험의 대상들을 창조한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칸트에게서는 분명 경험 인식이 경험의 대상들이 야기한 감각 인상들을 수용하는 것과 우리 자신이 스스로 산출해 낸 인식 능력이 합성될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KdrV B1). 이는 칸트가 대상에 대한 직관이 곧 그 대상의 창조를 의미하는 신의 원본적 직관과 대상이 야기한 감각 인상을 수용할 뿐인 유한한 인간의 직관 사이에 분명한 차이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헤겔의 과제
 대상과 유한한 의식 사이에 날카로운 구분을 두는 위와 같은 칸트적 구도를 비판하면서 헤겔은, 의식이 자기 자신과 대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립을 해소시키고자 하였다. 『대논리학』에서 헤겔은 순수 학문은 의식의 대립을 해방시키는 것을 전제한다고 말하면서, “학문으로서의 진리는 순수하게 스스로를 전개하는 자기의식이며, 즉자 대자적 존재자가 의식된 개념으로서의 자기라는 형상을 갖지만, 이러한 개념 자체가 곧 즉자 대자적인 존재자이다”고 말한다(WdLⅠ 43f). 헤겔이 말하는 학문의 진리는 바로 의식과 대상의 대립을 해소한 개념이 곧 대상을 다른 대상이 아닌 바로 그 대상으로 정립하고 이 대상을 의식에 대한 대상으로의 정립함으로써 의식과 대상이 자기의식으로의 통일되는 운동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과 의식의 대립이라는 가상을 극복한 학적인 자기의식은 단순히 주관적 의식이 아닌 ‘객관적’ 의식, ‘객관적 사유’이기도 하며, 오직 “이러한 객관적 사유가 순수 학문의 내용인 것(WdLⅠ 43f)”이다.

   참된 인식의 내용은 … 참된 질료이지만, 이 질료가 사실 순수 사유이므로, 그에 대해서 형식이 어떤 외적인 것이 아닌 이 질료는 형식 자체인 것이다(WdLⅠ 43f).

따라서 헤겔에게서 학문의 진리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해소한 ‘객관적’ ‘사유’이며, 이러한 해소의 운동으로서의 개념은 사유의 질료이자 동시에 형식인, 즉자 대자적 존재자인 것이다.1) 확실히 헤겔의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은 학적 진리를 정초하는 개념의 운동으로 드러나는데, 이로부터 헤겔은 ‘참된 것’(das Wahre)이 ‘주체’(Subjekt)로서도 파악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나아가 이 주체로서의 ‘참된 것’이 곧 ‘전체’(das Ganze)라고도 말한다(PdG 22-26). 그것은 바로 ‘참된 것’으로서의 ‘주체’가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운동”이자 “자기 자신과의 매개를 통하여 스스로 변화하는(Sichanderswerden; 스스로 타자가 되는)” 바로 그러한 ‘존재’, ‘살아 있는 실체’이기 때문이다(PdG 22-26). 따라서 헤겔에게서 타자성은 개념의 운동에 의거해 전체에로 지양되는, 주체성의 하나의 계기인 것이다.

아도르노의 헤겔 비판
 아도르노의 헤겔 비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위와 같은 개념과 타자성의 문제이다. 『부정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부정으로서의 규정은 곧 비동일자로서의 대상에 접근하는 규정이라고 말한다(ND 152). 그런데 위와 같은 규정에 기초한 동일성 사유는 어떤 것이 무엇에 속하며 그것이 무엇을 대표하는지, 즉 그것 자체가 아닌 어떤 것을 말한다는 점 때문에, 대상에 가까이 갈수록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ND 152). 아도르노는 이러한 동일성 사유가 바로 동일성이 존재한다는 생각, 즉 사물이 그 자체 개념과 일치한다는 생각을 전게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망상일 뿐이라고 비판한다(ND 152). 아도르노가 이러한 비판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헤겔의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 테제를 뒷받침하는 전통 철학의 암묵적인 전제들이 동일성 사유로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비동일자에 개념을 덧씌워, 철학으로 하여금 모순적인 진리 주장을 하도록 기능했다는 점이다. 정비하고 삭제하는 개념이 그 자신을 뛰어 넘어 비개념적인 것에 접근할 수 있다는 믿음은(ND 20ff), 분명 모순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로부터 아도르노가 개념을 통해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비동일자와 그것의 타자성을 단순히 승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객체의 우월성’(die Präponderanz des Objekts)에 관해 말하는 대목에서 아도르노는 분명 주체에 대한 객체의 무조건적인 우위를 주장하지 않는다(ND 184f). 그 이유는 동일성 사유가 궁극적으로는 주체의 주체성으로 객체성을 환원시키는 주관주의이며, 헤겔에게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것의 극단에서 전체를 ‘참칭’(Prätention)할지라도(ND 184f), 객체의 우월성을 단순히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유’하고자 한다면, 다시금 주체의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확실히 “객체는 단지 주체를 통해서만 사유될 수 있다. 그러나 주체에 대해서 언제나 타자로서 스스로를 보존한다(ND 184f).” 주의해야 되는 것은 아도르노가 헤겔의 개념과 타자성의 구도와는 전적으로 상반된 구도를 갖고서 헤겔의 동일성 테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도르노는 주체성을 경유하지 않고서 타자성에 대해서 논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단지 주체의 반성, 주체에 대한 반성에 의해서만 객체의 우월성에 도달할 수 있다(184f).

물론 이것이 아도르노가 어떤 의식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을, 헤겔 이후의 새로운 주체 철학을 전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는 없다. 아도르노는 의식으로, 주체의 반성으로, 개념의 포섭작용으로 환원될 수 없는 비동일자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비동일자에 대한 사유가 주체성을 말소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헤겔의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 테제는 타자를 자기 안에 포섭하는 개념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서 개념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타자성을 말소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말소가 타자성에 대한 승인과 병행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 이유는 개념의 변증법적 운동이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 이루어지기에, 즉 타자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타자이며, 이를 통해 타자의 타자성을 승인(부정)하는 동시에 그것을 개념에 대한 타자로, 즉 개념 안에로 포섭(부정의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적 지양의 과정이 바로 사유의 변증법이다. 다시 말하면 사유의 운동은 그 자체가 변증법적 과정, 부정을 통해서 ‘다양한’ 현상에 규정을 부여하고 이로부터 특정한 현상들을 어떤 개념에 ‘대한’ ‘단일한’ 현상으로 정립하는 것이 변증법적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헤겔의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 테제는 사유의 변증법이 곧 존재의 변증법이기도 하다는 것, 사유와 마찬가지로 존재도 변증법적으로 운동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사유가 변증법적이듯이 존재도 변증법적인가? 그래서 결국 비동일자에 대한 사유가 헤겔의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 테제에 대해 제기하는 비판은 사유의 변증법이 존재에도 해당되는가라는 문제를 함축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것에 대한 반박 또한 함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박은 타자성에 대한 인정을 어떤 공허한 구호로 포장하지 않기 위하여 존재의 변증법적 운동이 사유에 반영된, 그리하여 어떤 의미에서 타자성을 탈각시킨 ―물론 다른 의미에서는 분명 타자를 어떤 개념에 대한 타자로 승인함으로써 특정한 타자성을 함축하는― 존재의 ‘거짓된’ 운동임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과제 역시 함축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한 헤겔 극복의 시도
 그래서 헤겔의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 테제와 대결한다는 것은 이러한 근본적인 과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과제는 단지 타자성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나아가 아도르노가 제기한 문제에 함축되어 있는 과제가 과연 ‘변증법’ ―설령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일지라도― 에 기초해서 수행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보다 상세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물론 이는 결코 아도르노가 단지 타자성만을 소리 높여 외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필자는 아도르노와 마찬가지로 주체성을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비동일자에 대한 사유와는 또 다른 사유의 차원, 곧 인간과 존재의 공속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유를 확인하는 것으로 본고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동일률』에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변증법을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간에 우리가 모든 것을 질서와 매개 속에서 표상하는 한, 우리는 인간과 존재의 현존하는(vorwaltend) 공속을 오인한다(SdI, 38-42)

헤겔의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 테제와 관련하여 하이데거의 인간과 존재의 공속에서 역설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양자의 ‘공속’ 안에서 말해지고 있는 ‘차이’이다. 인간과 존재의 공속이 말하는 것은 사유하는 주체인 인간의 반성행위에로 존재가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 인간의 사유로는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과 존재의 공속에는 역설적으로 헤겔의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과는 정반대의 것, 양자의 공속에 내재해 있는 ‘차이’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물론 단지 이러한 언명만으로 하이데거가 헤겔의 문제틀을 극복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비동일자에 대한 사유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존재의 공속에 대한 사유도 인간의 ‘사유’에 기초한다. 그리고 이 사유는 (그것이 비동일자로고 불리든, 존재라고 불리든) 근본적으로 무엇에 대한 사유이다. 그것은 이 사유가 대상을 사유하는 주체의 주체성으로 환원하지 않으며, 그 대상성을 주체의 사유에로 환원시킬 수 없는 타자성으로 적극적으로 인정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헤겔의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 테제와 대결하면서도 헤겔을 단순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참 고 문 헌*

Adorno, T., Negative Dialektik, Darmstadt :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97.

Kant, I., Kritik der reinen Vernunft, Harburg: Verlag von Felix Meiner, 1956.

Hegel, G. W. F., Wissenschaft der Logik, Frankfurt am Mein: Suhrkamp, 2007.

-------------, Phänomenologie der Geistes, Frankfurt am Mein: Suhrkamp, 2007.

Heidegger, M., Sein und Zeit, Tübingen: Max Niemeyer Verlag, 1953.

--------, M., "Der Satz der Identität", Identitäẗ und Differenz, Tübingen: Verlag Günther Neske, 1957.


1) 이로부터 우리는 하이데거 말하듯이 헤겔의 개념이 “스스로를 사유하는 사유 자체의 형식”임을 의미하며, 나아가 데카르트의 “나는 내가 사물을 사유하는 것을 사유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형식화시킨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SuZ 433). 

 

Posted by Kao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