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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aj Pensoj2010/02/01 17:21

*이 글은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진행되는 <죽음의 계보학> 강의의 한 꼭지로 기획된 하이데거의 죽음론의 강의안이다. 어찌보면 내가 처음으로 하게 된 (철학 관련) 대중(아니 다중이라고 불러야 맞는 것이지 모르겠다^.^;) 강의였던 것 같다. 초급 에스페란토 강의를 해본 적이 있지만 초급 에스페란토 강의의 경우에는 교재가 있어서 별도의 강의안이 필요치 않았었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죽음론 강의에서는 강의안이 없을 경우 강의를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았고 그래서 강의안을 작성하게 되었다. 사실 강의안을 작성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하이데거에게서 죽음이 갖는 의미가 나 자신이 연구해야 될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의 연구 과제이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래서 강의에서 단순히 전달만하면 되는 어떤 자명한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강의안을 작성하는 것이 강사로서의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필수적인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게서 죽음이 갖는 의미가 나 스스로 연구해야 될 과제로 되었기 때문에, 강의안을 요점 정리식으로 작성하지 못하고 줄글로 서술되게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던 것 같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연구와 강의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줄글로 작성된 강의안을 읽어가면서 보조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내용을 전달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는데, 강의를 수강하셨던 분들은 그와 같은 방식보다는 요점만을 말로써 간단하게 정리해 주는 것을 더 선호하셨던 것 같다. 실제로 강의가 끝나고 수강을 하셨던 분들 중 한 분이 그와 같은 말씀을 해주시면서, 덧붙여 그처럼 요점만을 정리해주고 강의안을 강의가 끝난 다음 수강생 각자가 읽도록 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참고해야 될 중요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또 수강을 하셨던 분들에게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나는 한 번의 강의를 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매분기 8회, 아니 사실 그 이상의 강의를 하시는 조 선생님, 정 선생님의 역량이 정말 대단하다는 점이었다. 분명 이번 강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하게끔 만든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________________^

다중지성의 정원 2010년 1분학기 <죽음의 계보학> 제4강

하이데거와 죽음의 문제


『존재와 시간』과 존재물음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존재론적 차이로 규정하며 이를 자기 사유의 핵심적인 원리 중 하나로 삼는다. 존재자는 우리가 흔히 보는 사물들, 즉 책상, 연필, 칠판 그리고 우리 자신인 인간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인간, 즉 현존재의 존재를 염려(Sorge)로 규정하며,1) 또 우리가 세계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사물인 도구의 존재를 사용사태(Bewandtnis)로 규정한다.(Heidegger 1953, 84) 그리고 때로 하이데거는 존재를 존재구성틀(Seinsverfassung)로 규정하고 이 존재구성틀을 구체적으로는 ‘무엇임’(Was-sein)과 ‘사실임’(Dass-sein)으로 규정하기도 한다.2) 우리가 칠판을 ‘그 위에 글씨를 쓰기 위한 도구’로 이해하고 또 그것이 ‘여기에 거짓으로 있는 게 아니라 참으로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경우에, 이러한 칠판의 ‘무엇임’과 ‘사실임’에 대한 이해는 칠판이라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이해이다. 이는 어떤 존재자의 무엇임과 사실임이 곧 (존재자가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저술들에서 이러한 존재규정은 극히 이례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전후기 하이데거의 분수령이라고 말해지는 1930년의 강의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 이후에 위와 같은 존재규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하이데거가 드물기는 해도 존재를 염려, 사용사태, 무엇임과 사실임 등으로 규정했음을 확인했는데, 사실 이러한 존재규정에서 공통적인 것은 그것이 존재자의 존재라는 점이다. 하지만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만약 우리가 칠판을 바라보면서 이 칠판이 안 좋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때, ‘칠판이 안 좋은 위치에 있음’은 분명 칠판과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그 칠판의 속성이 아니다.3) 우리가 칠판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안 좋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가 어떤 특정한 존재자를 이해하면서 (설사 명시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언제나 세계를 함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존재인가 존재자인가? 하이데거에게 세계는 결코 존재자의 총체가 아니다. 세계가 존재자의 총체라면 세계는 결국 존재자일 것이며 따라서 결코 존재일 수 없을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세계는 우리 자신인 인간 현존재의 존재와 다른 존재자들의 존재가 맺는 연관들의 전체, 존재연관의 전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칠판이 안 좋은 위치에 있음은 칠판이라는 존재자와 현존재 사이의 존재연관을 말해주고 있으며, 따라서 이와 같은 존재연관의 전체성인 세계가 결코 존재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우리가 존재가 무엇이냐는 물음을 던진다면 그 물음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이 제시될 수 없다는 점이다. 아니 존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답변은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다가 될 것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제기하는 물음 역시 존재가 무엇이냐는 물음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존재가 무엇이냐는 물음은 그 자체로 답변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하이데거에게서 “그것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은 오직 존재자에게만 해당될 수 있는 물음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은 바로 그것, 즉 존재자를 그 존재자이도록 해주는 것, 존재자를 바로 그러한 존재자로서 근거지우는 것(즉, 정초하는 것)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지만, 존재가 무엇이냐는 물음은 존재 자체를 정초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며, 존재는 존재자와 같은 방식으로 정초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물음인 것이다. 하이데거에게서 존재가 무엇이냐를 묻는 물음은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존재가 무엇이냐를 묻는 물음이 성립하지 않더라도 존재의 의미에 대해 묻는 물음은 성립할 수 있으며,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실제로 던진 물음 역시 바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서의 존재물음인 것이다.

 그런데 존재물음은 도대체 어떻게 물어져야 하는가. 존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고 하더라도, 이 물음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던져져야 하는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바로 ‘존재하다’를 의미하는 계사 ‘이다/있다’(ist)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되는데,4) 중요한 것은 계사 ist의 의미를 묻는 것은 ‘존재’, ‘있음’, ‘임’에 대해서 (설사 명시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이미 항상 이해하고 있는 존재자인 인간 현존재의 존재이해에 기초할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현존재에게서 비명시적으로 이해되어 있는 존재의 의미를 주제적 논구의 과제로 삼아서 명시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제기한 존재론의 과제인데, 이 과제는 곧 선존재론적인 존재이해를 존재론적인 존재이해로 정리작업하는 것이 된다. 이를 위해 하이데거는 존재를 이해하며 존재를 문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 현존재의 존재이해를 단초로 삼아서 『존재와 시간』의 논의를 진행한다. 『존재와 시간』 1편에서 제시된 현존재 분석론으로서의 기초존재론은 바로 현존재의 존재이해에 기초하여 존재물음을 새롭게 정초함으로써 존재 일반의 의미를 명시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제시된 것이다.


현존재의 존재이해

 하이데거에게서 존재는 오직 현존재의 존재이해 속에만 존재한다. 존재와 존재자를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는 우리의 일상적인 용어법에서 이는 대단히 이상하게 들린다. 사유 바깥의 존재가 실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지 않는가? 하지만 하이데거의 용어법에서 사유 바깥의 존재가 실재한다는 표현은 존재자가 놓여야 할 자리에 존재를 놓은 과오를 범한 것이다. 사유 바깥의 존재자는 실재하지만 사유 바깥의 존재는 실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이데거에게서 존재가 분명 존재자와 연관된 것일지라도 존재자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게서 존재이해는 ‘객체로서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 존재이해가 객체로서의 존재에 대한 이해라면 그것은 존재자에 대한 이해이지 존재이해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또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이해가 단지 주체의 어떤 능동적인 사유작용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이 능동성이 단순히 사유하는 주체의 ‘의식적인’ 인식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존재이해가 단순히 주체의 어떤 무의식적이고 수동적인 사유작용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하이데거에게서 존재이해는 현존재 자신의 존재구성틀, 즉 존재구조에 속한다. 존재이해가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에 속한다는 것은 존재이해가 단순히 의식적/무의식적 혹은 능동적/수동적 사유작용으로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면 도대체 존재이해가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에 속한다는 것이 갖는 함의는 무엇인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Dasein)는 거기에(da) 있음(sein)을 의미한다. 이는 현존재가 이미 항상 거기에, 즉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항상 이미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지 않은가? 이 자명한 사실이 도대체 무엇을 말해준단 말인가? 그런데 우리에게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 철학적인 회의의 대상이 되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데카르트에게서 우리가 그 안에서 존재하는 세계의 실재가 분명하게 철학적 회의의 대상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 주체가 고립된 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항상 세계에로 초월하여 실존하고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주객관계, 즉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하는 하이데거 의지의 표현이었다는 점이다. 인간 주체가 우선적으로 고립된 점으로 존재하면서 감정이입 등을 통해 다른 존재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 존재하면서 이미 항상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즉 존재연관을 맺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맺음의 끊임없는 수행으로써 현존재의 실존이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맺음은 물론 현존재 자신의 존재와 다른 존재자들의 존재 사이의 관계맺음인데, 그래서 결국 현존재의 실존을 존재연관의 전체인 세계가 함께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가 현존재에 속한다는 것, 이는 현존재의 존재이해가 곧 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미 항상 세계에로 초월하여 실존하는 현존재는 언제나 세계이해를 포함하는 존재이해를 수행하면서 살아간다. 이는 현존재 실존의 조건이다. 따라서 현존재의 존재이해가 세계이해를 포함하기 때문에, 현존재의 존재이해는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넘어서 있는 것이며, 객체에 대한 주체에 어떤 단순한 (능동적/수동적 혹은 의식적/무의식적) 인식작용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이 존재이해가 분명 객체에 대한 주체의 단순히 의식적인 인식작용이라는 의미의 능동성을 넘어선 어떤 능동성을 체현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하이데거에게서 이러한 존재이해가 여전히 현존재 ‘자신’의 존재이해이며, 그래서 현존재의 자기이해가 세계이해를 포함한 모든 존재이해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세계이해가 현존재의 자기이해에 근거하며 현존재가 세계 안에서 만나는 다른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이해 역시 다시금 세계이해에 근거하기 때문에, 현존재의 자기이해가 모든 다른 존재이해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사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현존재가 수행하는 세계내부적인 다른 존재자의 존재이해와 세계이해는 모두 현존재의 자기이해의 양태들이다. 모든 이해는 근본적으로 현존재의 자기이해이다. 어떤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이해는 현존재 자신의 그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이해이지 어떤 다른 누군가의 이해가 아니다. 현존재의 세계이해 역시 현존재 자신의 세계이해이지 현존재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해준 이해가 아니다.


현존재의 존재: 자아와 자기의 구분과 현존재의 자기이해에서 가능성의 문제

 우리는 앞서 하이데거에게서 존재와 존재자가 구분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이는 현존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존재자로서의 현존재와 현존재의 존재는 다르다. 현존재는 분명 존재자로서 실존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현존재의 존재는 존재자로서의 현존재로 환원되지 않는다. 앞서 확인했듯이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를 염려로 규정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염려는 다시금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 곁에 있음으로서 자기를 앞질러 이미 (세계) 안에 있음”(Sich-vorweg-schon-sein-in-(der-Welt-) als Sein-bei (innerweltlich begegnendem Seienden; Heidegger 1953, 192) 현존재의 존재인 염려가 위와 같이 규정될 때 그것이 갖게 되는 함의를 가능성과 관련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우선 하이데거가 존재와 존재자의 구분을 현존재에도 마찬가지로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이유에 대해서 간략히 검토하기로 하자.

 존재자로서의 현존재와 현존재의 존재의 구분은 곧 자아자기를 구분하는 것이다. 자아는 존재자로서의 현존재를 가리키지만 자기는 현존재와 연관됨에도 불구하고 존재자로서의 현존재로 환원되지 않는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자아와 자기의 구분을 자아의 동일성(Identität; 정체성)과 자기의 동일함(Selbigkeit)을 구분함으로써 분명하게 제시한다.(Heidegger 1953, 130)5) 자기는 자아와 똑같은 것이 아니며 어떤 반성적인 자아경험과 자기이해가 동일시되어서도 안 된다. 반성적인 자아경험은 존재자로서의 현존재가 스스로에 대해 수행하는 주체적 반성을 의미하지만 현존재의 자기이해는 주체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존재의 자기이해는 세계에로 초월하여 실존하는 현존재가 언제나 수행하는 세계이해를 이미 항상 함축하며 따라서 이는 어떤 자아로서의 주체 자신에 대한 반성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현존재가 세계내부적 존재자 곁에서 그 존재자에 반성 없이 몰두할 때의 세계내부적 존재자에 대한 현존재의 이해 역시 현존재의 자기이해의 한 파생적 양태이다. 물론 이러한 자아와 자기의 구분에서 중요한 것은 현존재의 자기가 수행하는 현존재의 존재와 세계내부적인 다른 존재자들의 존재 사이의 관계맺음으로 현존재의 실존이 구성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관계맺음이 곧 현존재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맺음이라는 점이다. 

 하이데거가 자아와 자기를 구분하고 자기가 수행하는 관계맺음에 기초하여 인간 주체의 실존적 구조를 규정하는 것은 사실 하이데거에 미친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이었다.6) 키에르케고르는 자기를 ‘자기 자신과 스스로 관계맺는 관계’(ein Verhaltnis, das sich zu sich selbst verhält)로 규정하는데,7) 이는 자기가 이미 항상 어떤 정체성(동일성)을 유지하는 단순한 존재자, 즉 자아와 같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 자신과의 관계맺음을 수행하며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키에르케고르에게 자기는 자기와의 관련 속에서 그 자신이 정립하는 그것, 즉 자기와 이미 항상 관련을 맺고있는 그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자기 자신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자기를 규정하는 이유는 사유하는 주체가 아닌 존재하는 주체를 정초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는 오직 자기 자신과의 관계맺음을 수행하면서 존재하는 주체만이 존재하기 위해 (‘사유’가 아닌) ‘수행’을 행하기에, 주체의 자기관계적 수행성만이 스스로를 (단지 ‘사유’하는 주체가 아닌) ‘존재’하는 주체로 정립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8) 

 『존재와 시간』의 현존재의 자기도 키에르케고르의 자기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자기관계적 수행성에 기초하여 그의 실존을 구성하는데, 이처럼 하이데거가 (자아와 구분되는) 자기를 강조하는 이유는 현존재의 자기가 자기 자신과의 관계맺음의 수행을 통해서 스스로를 가능존재로 구성해 나가는 것을 증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그때마다 그 자신으로 실존하는, 단지 그때마다 수행적으로 실존하는 ‘자기존재’(Selbstsein)로 보며,9) 현존재가 자기 자신과 관계맺는 것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자함’(Zu-sich-selbst-sein)으로 규정한다.10) 키에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 역시 ‘자기’를 ‘자기 자신과 관계맺는 관계’로 규정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하이데거에게서는 이러한 현존재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맺음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자함’이라는 점에서, 현존재의 자기의 이와 같은 수행적 관계맺음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관계맺음의 수행이 현존재의 가능성에 기초해 있다는 점이다.

 현존재는 분명 현실적인 존재자이지만 또한 가능적으로도 존재하는 존재자이다. 현존재가 현실적 존재자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거기에 존재하는 그러한 존재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현존재가 가능적 존재자가 아니라면 그에게는 더 이상 미래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이데거의 염려 규정은 현존재가 가능적 존재자라는 점을 증시하고 있다. 염려의 규정인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 곁에 있음으로서 자기를 앞질러 이미 (세계) 안에 있음”에서 자기를 앞질러가 현존재가 가능적 존재자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자기를 앞질러는 현존재가 가능적으로 실존한다는 것, 현존재의 실존에 가능성이 속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실존에 현실성과 가능성이 함께 속해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현실성 개념 대신 현사실성(Faktizität) 개념을 제시한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사용하는 가능성 개념은 (어떤 공허한 가능성이 아니라) 현사실적 가능성인데, 이러한 현사실적 가능성은 현존재의 실존에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서, 이러한 가능성에서부터 현존재는 자기를 이해하고 동시에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현존재가 현존재의 자기이해에 기초해서 세계내부적인 다른 존재자의 존재와 관계맺음을 수행하면서 실존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이러한 관계맺음의 수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현존재의 세계내부적인 다른 존재자의 존재이해는 바로 현존재의 현사실적 가능성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책을 ‘정신의 구축물’로 이해하든지, ‘책장을 꾸미기 위한 장식물’로 이해하든지, ‘15,000원의 값어치를 갖는 상품’으로 이해하든지, ‘괴한에게 던질 무기’로 이해하든지, ‘조금은 불편한 베개’로 이해하든지, 이 모든 이해는 단순히 실제의 책이 갖는 현실성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 자신의 가능성에 기초하여 형성되는 책이라는 존재자의 존재의 의미에 근거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존재가 단순히 현실성에 기초하여 존재이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에 기초하여 그의 존재이해를 수행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하이데거에게서 이러한 존재이해의 수행은 무엇보다도 현존재 자신의 가능성을 그 핵심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하이데거에게서 죽음의 문제가 제기되는 맥락은 바로 이와 같은 현존재의 존재이해와 가능성과 연관된다.


현존재의 실존과 죽음의 가능성

 현실성과 가능성은 분명히 다르다. 현실성은 우리의 눈앞에 존재하는 사물들, 우리가 우리의 손 안에 쥐고서 사용할 수 있는 도구 등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실재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가능성은 이와 같은 식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존재가 현실적인 존재자일 뿐만이 아니라 가능적인 존재자로서 실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존재가 가능적인 존재자로서 실존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한 현존재가 언제나 아직 아님(Noch Nicht)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Heidegger 1953, 233) 현존재가 아직 아님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현존재는 그의 아직 아님으로 앞질러 달려가볼 수 있는 것, 즉 선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현존재만이 아직 아님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익어가는 과일 역시 아직 아님으로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존재의 아직 아님과 과일의 아직 아님이 동일한 것인가.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과일의 아직 아님과 현존재의 아직 아님은 분명히 다르다.(Heidegger 1953, 244) 왜 다른가. 사과는 익어가면서 익을 수 있는 자신의 가능성을 완성한다. 하지만 아직 아님으로 존재하는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 그 가능성을 완성하는 것일 수 있는가. 물론 현존재의 어떤 가능성은 분명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 동시에 그 가능성을 완성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죽음의 계보학> 강의를 수강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 가능성을 실현하여 강의를 수강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이 가능성을 (최소한 어떤 의미에서는) 완성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의 가능성은 어떠할까?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 그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가능성, 어느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줄 수 없는 가능성이며, 그리하여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다. 하이데거는 이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 현존재의 실존을 언제나 함께 구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분명 죽음의 가능성을 망각하거나 죽음을 당장은 나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과연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죽음의 가능성이 익어가는 사과의 가능성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죽음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사과의 익을 수 있는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그 가능성의 완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죽음의 가능성이 생물학적인 죽음을 의미한다면. 그 가능성의 실현을 통해서 현존재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아마도 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 즉 (Nichts)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물학적인 죽음의 가능성으로서 사유할 수 있는 유일한 표상일 것이다.(물론 시체는 제외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은 우리가 실제의 죽음을 겪어보지 않고서 그저 떠올릴 수 있을 뿐인 표상일 뿐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무의 표상이 가능한 것인가. 무는 아무것도 아님, 없음인데 어떻게 없음을 표상할 수 있는가. 우리는 있는 것을 표상할 수 있으며, 있는 것을 바로 그것의 현실성에 기초하여 표상할 수 있지만, 없음, 아무것도 아님을 어떻게 표상할 수 있단 말인가. 사과의 익을 수 있는 가능성과 죽음의 가능성의 차이는 사과의 익을 수 있음이라는 가능성은 우리가 표상가능한 것이지만 죽음의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표상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의 표상은 실제의 그것을 겪어보지 못한 채 그저 떠올린, 그런 근거없는 표상일 뿐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죽음의 가능성을 흡사 무로서 표상할 때, 우리는 (사실은 그러한 표상이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을 더 이상 가능성으로서 견지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이다. 그래서 언제나 미완으로 존재하는 존재자, 아직 아님으로 존재하는 현존재가 그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실현하여 스스로를 완성한다고 생각할 때, 사실 그러한 가능성은 현존재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이 아니라 그저 현실적인 것에 기초하여 투사된 가능성, 현실적인 것과는 그것이 아직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만 구분되는 가능성일 뿐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런 가능성들, 즉 현실성과는 단지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구분되는 가능성들에 기초하여 존재이해를 수행하고 우리의 실존을 구성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러한 가능성들에 기초하여 현존재가 살아갈 때, 그는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항상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현존재가 자기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에 기초하여 스스로를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다른 존재자들, 즉 타인들과 사물들에 맞추어서 스스로를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 바로 현존재의 일상적 삶이고 그래서 현존재는 일상적으로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에 기초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의 존재자들을 배려하면서(besorgen) 그것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 안의 존재자들에 맞춰서 살아감은 현존재의 고유한 가능성에 따라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이로부터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성에만 안주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적으로 현존재는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성에 안주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서 죽음의 가능성은 이와 같은 현실성의 안주로부터 현존재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에 기초하여 스스로를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며 세계내부적인 다른 존재자들과의 새로운 관계맺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죽음의 가능성은 현실적인 가능성, 즉 실재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현실성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현실적 가능성과 다르다. 현존재의 현사실적 가능성인 죽음의 가능성은 현실성과는 관련이 없다. 현존재 자신의 고유한 자기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죽음의 가능성은, 가능성으로서의 가능성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현존재에게서 죽음이 갖는 의미는 가능성으로서의 가능성이라는 죽음의 가능성의 성격을 우선적으로 제시할 것을 요구한다.


가능성으로서의 가능성인 죽음의 가능성

 만약 실제로 현존재가 죽는다면, 더 이상 죽음은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실제적인 것이 될 것이다. 때문에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현존재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하지 결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현존재의 실존에 속해 있으며 실존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죽음이 어떻게 현존재의 실존을 규정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죽음의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문제시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가 죽음에 대해 일정한 태도를 내렸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으며, 결코 누군가에 의해서 대리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현존재는 이미 항상 일정한 태도를 내렸다. 물론 우리는 일상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그저 타인의 죽음으로, 나와는 당장은 관련이 없는 미래의 사건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물론 이것 역시 죽음에 대한 태도인데) 이 모든 죽음에 대한 태도에 있어 분명한 사실은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우리 실존의 가능성이며, 우리가 존재하는 한 (그것이 언제가 될는지는 알 수 없더라도)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 피할 수 없는 가능성인 죽음의 가능성을 은폐한다. 이러한 은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은폐한다는 것,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고유한 가능성을 가능성 그 자체로서 견지하지 못하고 오직 현실성에 비춰서 우리의 가능성을 사유하며, 이러한 가능성에 따라서 우리의 존재이해를 수행한다는 것을 말한다. 죽음의 가능성은 현실성에 매몰되어 존재이해를 수행하는 가능성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죽음의 가능성은 실재적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현실성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가능성이 아니며, 현실성과는 도달할 수 없는 격차를 갖는 가능성이다. 죽음의 가능성이 열어밝혀질수록, 현존재 자신이 죽음의 가능성을 그에 대한 일상적인 은폐 경향을 거슬러서 열어밝힐수록, 현존재는 점점 더 현실적인 것이 아닌 가능적인 것에 가까이 가며, 가능적인 것의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진다.

 물론 우리는 결코 죽음의 가능성이 열어밝혀지면서 고지되는 그것의 내용을 일반적으로 성격규정할 수는 없다. 죽음의 가능성이 그 누구도 대리할 수 없는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피할 수 없는 가능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죽음의 가능성이 개방하는 가능적인 것의 내용에 대해 결코 이러저러한 규정성을 임의로 부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의 가능성이 현존재의 실존에 갖는 의미, 즉 현존재의 실존이 어떻게 죽음의 가능성으로서 구성되는지, 그것이 현존재의 삶을 어떻게 구조화하는지에 대해 (설사 형식적일 뿐이더라도) 규정할 수 있다. 죽음의 가능성이 현존재의 삶에서 가능성으로서의 가능성 그 자체로서 열어밝혀져야 하는 이유가, 물론 단순히 현실성에서 눈을 돌려서 이제는 가능성도 좀 보자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가능성이 가능성으로서 열어밝혀져야 하는 이유는 하이데거에게서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자기이해의 회복이 (현존재의 삶에서) 마땅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죽음으로의 선구(Vorlaufen)는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서의 가능성으로의 선구인데, 이는 죽음의 가능성에로의 가능한 한 가장 가까이 다가감이 현실적인 것과는 가능한 한 가장 멀어짐으로서, 바로 가능성을 그 자체 현실성에서 해방시켜서 비로소 처음으로 현실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으로의 선구로부터 비로소 가능해지는 가능성의 현실성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왜 죽음으로의 선구가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인가. 그리고 왜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은 회복되어야 하는가. 이 물음은 (하이데거의 유명한)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구분에 대한 검토를 요구하는 것인데, 죽음의 가능성은 바로 현존재의 비본래적 존재양태로부터 본래적 존재양태로의 변양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현존재 실존의 본래성/비본래성과 죽음의 문제

 우선적으로 명심해야 되는 것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래성과 비본래성이 존재양태 사이의 구분이라는 점이다. 이는 본래성이라는 속성 혹은 비본래성이라는 속성을 자기의 속성으로 가진 현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성과 비본래성은 현존재가 어떻게 자신의 존재이해를 수행하느냐에 따른 구분을 말한다. 그래서 본래적 존재이해가 있고 비본래적 존재이해가 있는 것이며, 오직 이러한 존재이해의 구분의 연장선상에서만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구분이 제시되는 것이다. 양자는 속성상의 구분이 아니다. 이는 『존재와 시간』의 문제틀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본래적인 혹은 비본래적인 현존재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이것이 특정한 시공에서 본래적인 혹은 비본래적인 존재이해를 수행하는 현존재를 지칭하는 것일 뿐이지, 언제 어디서나 본래성 혹은 비본래성을 그 자신의 속성으로 소유하고 있는 현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에게서 그러한 속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가 어떤 실체인 것도 아니다. 속성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은 동시에 그러한 속성을 소유하는 고정 불변의 실체를 전제하는 것이 된다.11)

하이데거가 말하는 비본래성은 현존재가 소유하는 어떤 속성이 아니라 바로 현존재가 일상적으로 실존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양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현존재의 일상적 실존은 어떠한가. 하이데거가 보기에 현존재의 일상성을 구성하는 것은 호기심잡담 등인데,(Heidegger 1953, 167-174) 호기심과 잡담은 현존재가 바로 자기의 고유한 가능성에 기초해서 존재이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현존재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 즉 세계 안에 존재하는 다른 사물들이나 현존재 자신이 아닌 다른 현존재들, 즉 타인들에 기초하여 스스로를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적으로 현존재는 자기의 고유한 가능성에 기초하여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 즉 사물들과 타인들에 기초하여 존재이해를 수행하며, 그리하여 이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에 퇴락해(verfallen) 있다. 현존재의 일상적 실존인 비본래성을 특징짓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 곁에 퇴락해 있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퇴락은 곧 현존재의 존재구조인 염려에서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 ‘곁에 있음’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이 ‘곁에 있음’은 현실적인 존재자 곁에 있음을 의미하며, 오직 (현실적인 존재자의) 현실성에 기초한 가능성만을 존재이해의 가능성으로 견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이와 같이 일상적으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에 퇴락해 있는 현존재를 세인(das Man)이라고 말한다.(Heidegger 1953, 167) 일상적으로 현존재는 세인으로서, 오직 비본래성의 존재양태로만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비본래성의 존재양태에서 은폐되는 것은 현존재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 죽음의 가능성인데, 이는 곧 비본래적 현존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여 배려되고 있는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 곁에 퇴락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재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가 일상적인 현존재의 비본래적 실존을 특징짓는 것이다. 그러나 비본래성이 현존재의 일상성을 특징짓더라도 현존재가 비본래적으로만 실존하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가 일상적으로 비본래적인 존재양태에서 실존하며, 그리하여 일상적으로 만나게 되는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에 신경을 쏟으면서 이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더라도, 현존재에게는, 그가 존재하는 한, 자기 자신을 문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 자기 자신을 회피하지 않을 가능성, 즉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이미 항상 존재한다. 이러한 본래적 존재이해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항상 존재해오고 있는 것, 즉 기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 현존재 실존에 속해있는 죽음의 가능성이 바로 본래적 존재이해의 가능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의 가능성 그 자체가 곧 본래적 존재이해의 가능성은 아니지만, 죽음의 가능성이 본래적 존재이해의 가능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현존재가 피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대리할 수 없는 자기의 죽음으로 선구하는 것이 바로 현존재의 본래성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래적 존재이해의 가능성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죽음으로의 선구는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일상적으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 곁에서 그것들에 퇴락해 있는 비본래적 현존재가 어떻게 죽음으로 선구하여 자기의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단적으로 말해서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으로의 변양이 가능한 이유는 불안(Angst) 때문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이미 항상 세계에로 초월하여 실존하는 현존재, 그래서 그의 실존에 세계가 속해있는 현존재의 ‘거기에’(da)를, 근원적으로 심정성(Befindlichkeit)과 이해(Verstehen)가 구성한다고 말한다.(Heidegger 1953, 133) 우리는 앞서 이해가 어떻게 현존재의 세계를 함께 구성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였다. 그것은 하이데거에게서 세계가 현존재의 존재와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존재 사이의 관계맺음을 통해서 구성되며, 이 관계맺음은 근본적으로 현존재의 자기이해에 근거하여 수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게서 이해는 보다 근원적으로 기분(Stimmung)에 근거하고 있다. 기분이 세계를 현존재에게 그러한 세계로 열어밝히는 것이며, 그래서 현존재가 수행하는 모든 존재이해는 기분잡힌 이해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책을 ‘정신의 구축물’로 이해하면서 그것을 정독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러한 이해에 앞서 정독을 할 수 있을 만한 기분에 사로잡혀야 한다. 우리가 책을 ‘괴한에게 던질 무기’로 이해할 때, 우리는 괴한에게 책을 집어던질 수 있기 위해서 그러한 기분에 먼저 사로잡혀야 한다. ‘정신의 구축물’로서의 책과 ‘괴한에게 던질 무기’로서의 책은 현존재와 책의 관계맺음에서 결코 똑같은 기분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심정성은 바로 이 기분을 하이데거가 존재론적으로 성격규정한 것이다. 그리고『존재와 시간』에서는 불안이 현존재의 근본 심정성으로 규정된다.

 왜 하이데거는 불안은 근본 심정성으로 규정하는가?12) 왜 하이데거에게서 현존재의 근본 심정성은 사랑이 아니라 불안인 것인가? 하이데거가 불안을 근본 심정성으로 본 이유는 하이데거가 살았던 당대의 역사가 이러한 기분을 근본 심정성으로 만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에서의 근본 심정성을 경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에서는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 자체 경이로움으로서 경험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근대에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고 보는데, 이는 곧 근대에서 세계에의 신뢰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에게는 근대가 태동하면서 이루어진 ‘원자화된 개인’에 대한 철학적 선취는 사실 세계에의 신뢰를 상실한, 소외된 정신의 자기 고백이 된다. 세계에의 신뢰를 상실한 개인의 근본 심정성을 하이데거는 불안이라고 보는데, 이는 역으로 세인의 호기심과 잡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세인의 호기심과 잡담이 세계에의 신뢰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을, 세계 안에 존재하는 사물들과 타인들에 대한 불신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이데거는 불안이 세인들에게서 일상적으로는 회피된다고 말한다. 일상적으로 세인은 불안을 표상가능한 그 무엇에 대한 공포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가 미래의 표상가능한 결과에 공포를 느끼며 이러한 공포를 없애고자 노력할 때, 예를 들어 우리가 내일 있을 시험을 걱정스러워하면서 현재를 시험 결과라는 미래의 가능한 표상에 기초하여 살아갈 때, 우리는 표상가능한 그 무엇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 바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 예를 들어 문제집에 몰두해 있는 것, 그 문제집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안의 대상은 표상가능한 그 무엇이 아니다. 현존재는 표상될 수 있는 그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다. 불안의 이유는 어떤 객체적인 것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존재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기가 죽음을 향해서 존재하며, 자기의 실존에 죽음의 가능성이 속해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불안이, 현존재에게 그가 존재하는 한 그가 죽음을 향해 있다는 사실, 결코 대리될 수 없으며 넘어설 수 없는 죽음의 가능성을 열어밝히는 것이다. 결국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은 현존재의 실존에 죽음의 가능성이 속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며, 이러한 죽음의 가능성은 불안에 의해서 일깨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불안이 바로 일상적으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에 퇴락한 채 실존하는 현존재로 하여금 그의 존재와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존재 사이의 관계맺음을 (우선적으로) 절단하는 것, 즉 현존재의 개별화(Vereinzelung)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13) 물론 그렇다고 불안으로부터 가능해지는 현존재의 본래성이 현존재를 무세계적인 주체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의 개별화는 일상적으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에 퇴락한 채 자기의 존재이해를 수행하는,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한 채로 실존하는 현존재로 하여금 자기의 고유한 존재를 문제시하도록 하며, 이로부터 가장 고유한 자기이해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장 고유한 자기이해로부터 다시금 세계내부적인 다른 존재자들, 즉 사물들과 타인들에 대한 이해 역시 비본래성에서의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래성에서 현존재가 무세계적인 주체로 자기 자신 안으로 함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이데거가 불안에서 이루어지는 개별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불안이 일으키는 죽음으로의 선구로부터 현존재 자신의 존재근거를 스스로 정초하는 것을 증시하기 위함이다. 개별화라는 표현은 결코 어떤 현존재 자신이 무세계적인 주체가 되는 것, 그리하여 현존재를 원자화된 개인, 유아론적인 주체로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하이데거가 극복하고자 했던 문제에 하이데거가 다시금 빠져드는 것, 그것도 다름 아닌 본래성에서 빠져드는 것을 말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이데거에게서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한 해명에 거의 도달하였다. 그러나 아직 검토해야 되는 것이 한 가지 더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현존재의 삶에서 죽음이 갖는 의미를 죽음과 시간의 관계에 비춰 규명하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명을 통해서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존재’와 ‘시간’의 연관이다. 하이데거에게서 죽음의 의미 역시 단순히 죽음으로의 선구가 현존재 자신의 본래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으로의 선구가 현존재의 본래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본래성이라는 존재양태의 시간성, 즉 본래적 시간성과 죽음으로의 선구가 갖는 연관이 증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증시는 곧 현존재의 삶에서 죽음과 시간의 연관을 증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현존재의 죽음으로의 선구와 시간성

 현존재의 존재인 염려는 그 자체 시간적 규정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자기를 앞질러’와 ‘이미’에서 표현되고 있다. ‘자기를 앞질러’는 미래를 함축하며 ‘이미’는 기재14)를 함축한다. 결국 현존재의 존재인 염려에서는 미래와 과거가 절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절합은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 ‘곁에 있음’에서 이 곁에 있음이 곧 시간상으로 현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염려에서는 미래, 기재, 현재의 세 가지 시간 계기가 통일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존재 분석론으로서의 기초존재론의 성과로 드러난 현존재의 존재구조, 즉 염려에서 존재와 시간의 연관이 제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현존재의 존재의 의미로, 즉 현존재의 존재인 염려의 의미로 규정한다.(Heidegger 1953, 323) 하이데거는 왜 시간성을 염려의 의미로 규정한 것일까? 그것은 시간성의 세 계기가 염려의 구조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기재하면서 현재화하는 미래로 규정하는데,(Heidegger 1953, 326) 여기서 기재는 현존재가 존재해오고 있는 존재자로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과 이미 항상 맺고있는 존재연관을 ‘간직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미래는 근본적으로 자기를 앞질러 존재하는 현존재가 가능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현존재는 이렇게 자기를 앞질러 실존하며 이로부터 특정한 가능성을 ‘기대함’으로써, 이에 기초하여 현재에 세계내부적인 존재들과 존재연관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현존재의 시간성에서 ‘현재화’는 현존재가 특정한 존재이해를 현재화함으로써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을 그러한 존재자들로서 해석하도록 하는 것, 즉 각각의 현재에서 특정한 존재이해를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현재화가 현존재의 미래의 가능성에 기초하여 수행되는 것이긴 하지만, 앞서 확인하였듯이 비본래적으로 현존재는 지극히 ‘현실적인’ 가능성에 기초하여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때문에 비본래적으로 현존재는 이러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 곁에 있으면서, 즉 이 존재자들에 퇴락해 있으면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현재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기대함’, ‘간직함’, ‘현재화’를 시간성이 비본래적으로 시간화하는 방식이라고 규정한다.(Heidegger 1978b, 264)

 그러나 현존재 실존의 양태들에 비본래적인 양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양태도 있듯이, ‘기재하면서 현재화하는 미래’인 현존재의 시간성도 비본래적으로만 시간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시간성이 본래적으로 시간화하는 방식을 ‘회복’(Wiederholung; 반복), ‘죽음으로의 선구’, ‘순간’이라고 말한다.(Heidegger 1953, 336-340) 다시 말하면 ‘죽음으로 선구하면서 반복하는(회복하는) 순간’이 본래적 시간성이 시간화하는 방식인 것이다. 현존재의 죽음으로의 선구는 바로 본래적 시간성의 본래적 미래를 의미한다. 현존재의 본래적 시간성은  현존재가 죽음으로 선구함을 통해 은폐된 채로 존재하오고 있던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회복되는(반복되는) 순간으로, 바로 그러한 본래적 존재이해의 가능성이 회복되는 순간으로서 시간화되는 것이다. 이 시간성의 본래적 현재인 순간은 현존재가 그가 존재하는 한 피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대리할 수 없는 자기의 죽음에로 선구할 때, 그러한 선구하고자 하는 결단을 통해서만 시간화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순간이 지금의 연속의 한 점일 수 없다고 말한다. 순간이 지금의 연속의 한 점이일 수 없는 이유는 사실 시간 자체가 과거 지금에서 현재 지금을 지나 미래 지금으로 진행하는 지금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존재인 염려가 바로 현존재의 실존이 이미 이러한 지금의 연속으로서의 시간관을 넘어서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 곁에 있음으로서 자기를 앞질러 이미 (세계) 안에 있음”에서 ‘자기를 앞질러’는 아직 아닌 지금을 함축하며, ‘이미’는 더 이상 아닌 지금을 함축하고, ‘곁에 있음’은 지금을 함축한다. 따라서 염려 규정에는 아직 아닌 지금, 더 이상 아닌 지금, 그리고 지금이 통일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현존재의 존재가 지금의 연속을 의미하는 시간관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현존재의 존재인 염려의 의미인) 시간성의 본래적 현재인 순간이 지금의 연속의 한 점일 수는 없다. 그것은 순간이 죽음으로의 선구를 통해서 현존재가 그의 고유한 미래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면서 이미 항상 존재해오고 있는 가장 고유한 자기이해의 가능성을 회복하는 바로 그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순간에서 현존재는 그의 고유한 미래로부터 죽음의 가능성이라는 탁월한 가능성을 견지한 채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 도래하는 것이다. 순간은 이렇게 죽음으로의 선구라는 결단으로부터 발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본래적 시간성의 비본래적 현재인 현재화처럼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의 현실성에 퇴락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단지 현실적인 가능성이 아닌) 가능성으로서의 가능성을 비로소 가능케 하는 것이며, 그래서 하이데거는 순간(Augenblick)을 결단의 눈길이라고도 부른다.15)

 이로써 현존재의 죽음으로의 선구가 시간과의 연관이 갖는 의미가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죽음으로의 선구로부터 말하고자 한 것, 혹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인 죽음의 가능성으로부터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검토하는 것으로 우리의 논구를 마치기로 하자.


하이데거에게서 죽음의 의미: 정초와 자유

 앞서 확인하였듯이 현존재는 가능적으로 실존하는 존재자, 그의 가능성에 따라서 (설사 그것이 사실은 현실성에 기초해 있으며 현실성과는 단지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다를지라도) 존재이해를 수행하는 존재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존재는 이미 그가 그 안에서 존재하는 세계에 내던져진(geworfen; 피투된) 존재자이다. 현존재가 세계에 내던져졌다는 것은 우선적으로는 현존재의 가능성이 그가 이미 항상 존재해온 세계 안에 주어진 가능성이라는 사실, 현존재의 고유한 가능성이 그가 놓여 있는 역사를 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함축한다. 그리고 또 현존재가 세계에 내던져진 채로 실존한다는 것은 현존재가 분명 그가 그 자신의 존재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가 원리적으로 자신의 세계 내의 실존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현존재의 고유한 가능성이 그가 놓여 있는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과 함께 그 자신이 그의 존재함에 대해 근거가 될 수 없으며, 그리하여 그의 실존에 책임이 없다는 것은,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어떤 역설적인 과제를 현존재에게 부과하는 것이 된다.

 현존재가 그의 실존에 책임이 없으며 자신의 존재함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그 근거가 아니라는 것은 그가 자신의 근거를 자기 스스로 놓아야 한다는, 자신의 존재함을 그 스스로 정초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으로의 선구로부터 고지되는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 가장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는 가능성은 바로 이러한 자기 존재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근거지움에 다름아니다. 물론 이러한 근거지움은 결단을 통해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에 퇴락해 있는 채 스스로를 이해하는 현존재의 자기이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그리하여 사물들에 대한 호기심과 타인들과의 잡담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무엇보다도 세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으로의 선구에서 고지되는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은 세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스스로를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근거지우는 가능성, 자기 실존의 근거를 스스로 정초하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이 바로 가장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함의 근거를 자기 스스로 떠맡게 하는 가능성임과 동시에, 이 가능성은 그가 놓여 있는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가능성, 즉 단순히 현실적인 가능성이 아니라 (굳이 현실적인 가능성과의 대비를 통해서 규정한다면) 어떤 역사적인 가능성이 분명하다. 그래서 현존재가 가장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는 가능성은 곧 그를 세인으로부터 벗어나서 역사적 존재로 스스로를 건립하는 가능성, 세인의 삶에서 은폐되어 있는 역사성을 구현하도록 하는 가능성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에게 역사성은 현존재에게 이미 항상 주어져있는 어떤 조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함의 이유를 스스로 정초함으로써 구현해야 될 과제인 것이다. 이것이 세계에 내던져진 채로 실존하는 현존재에게 주어진 역설적인 삶의 과제이다.

 하지만 이 역설적 과제는 현존재에게 어떤 짐스러운 무엇이 아니다. 이 과제는 현존재가 세인의 삶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그래서 현존재의 자유를 구성하는 것이다. 현존재에게 자기 자신의 존재함, 존재의 근거를 정초하라는 과제, 즉 현존재에게 그의 역사성을 구현하라는 과제와 현존재의 자유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존재의 자유는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라는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 그에게) 부과된 과제를 현존재 자신이 떠맡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자유는 오직 현존재가 죽음으로의 선구를 통해서 스스로를 세인의 삶으로부터 해방시킬 때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방은 오직 현존재가 죽음으로의 선구를 결단하는 본래적 시간성의 본래적 현재인 순간에만 가능한 것이다. ‘죽음에로 선구하면서’ 이미 항상 존재해오고 있는 자기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회복하는’ ‘순간’에 현존재는 주어져 있는 역사, 즉 Historie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구현되어야 할 역사, 그가 만들어가야 할 역사, 즉 Geschichte의 과제를 떠맡는다.16)

 우리는 앞서 순간이 지금의 연속의 한 점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하이데거가 순간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지금의 연속의 한 점이 아니라 바로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존재함의 근거를 떠맡아서 자시 자신으로 실존하는 과제, 자신의 역사성을 구현하는 과제에 대해 결단을 내리는 것, 그리하여 그가 천편일률적인 지금 안에서 퇴락해 있는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로부터 자유로워져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순간의 시간성을 다시금 규정한다면, 그것은 바로 현재 안에서 회복되는(반복하는) 기재와 도래하는 미래 사이의 첨단(Spitze), 회복되는(반복하는) 기재와 도래하는 미래가 쇄도하는 현재의 첨단이라고 할 수 있다.17) 따라서 역으로 순간은 기재가 회복되며 동시에 미래가 도래하는 현재, 기재와 미래에로 동시에 분기하는 현재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재가 어떤 천편일률적인 지금의 연속의 한 점이 될 수는 없다.

 결국 하이데거에게서 죽음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을 것 같다. 본래적 시간성의 본래적 현재인 순간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으로의 선구는 현존재를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의 퇴락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자기 스스로 정초하도록 한다. 죽음으로의 선구가 가능하게 하는 자기 정초는 곧 현존재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지만, 이러한 자기 되기는 동시에 역사적 존재자로서의 현존재 자신의 자기 건립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고유한 죽음, 어느 누구도 대리할 수 없는 자기의 죽음으로 선구하는 순간에만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유는 현존재가 자기 자신이 되라는 (현존재에게 주어지는) 가장 준엄한 과제이기도 하며, 현존재의 자유는 오직 이 과제를 자기 스스로 떠맡는 역설적인 자기 해방의 순간에만 존재한다.  



1)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Tübingen, Max Niemeyer Verlag, 1953, p. 57; 소광희 옮김, 『존재와 시간』, 경문사, 1995; 이기상 옮김, 『존재와 시간』, 까치글방, 1998.

2) Martin Heidegger,  “Vom Wesen des Grundes”, in Wegmarken, Frankfurt am Main, Vittorio Klostermann, 1978a, p. 28, 65; 이선일 옮김, 「근거의 본질에 관하여」,『이정표』, 한길사, 2005.

3) 물론 존재자의 무엇임과 사실임 역시 그 존재자의 속성은 아닌데, 이는 예를 들어 만약 망치의 무엇임이 ‘못을 박는 도구’임과 동시에 만약에 괴한이 침입했을 경우, 우리에게 망치의 무엇임은 이제 더 이상 ‘못을 박는 도구’가 아니라 ‘괴한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무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이 물음은 그것이 사용되는 문장에서 다양한 의미를 갖는 ist의 의미의 다양성과 이 의미의 다양성을 가능하게 하는 술어 표현의 단일성에 대한 물음이 된다. 예를 들어 『근본개념들』에서 하이데거는 계사 ‘ist’를 분석하며 “Dieser Mann ist aus dem Schwäbischen”(그 사람은 슈바벤 출신이다), “das Buch ist dir”(이 책은 너의 것이다), “der Feind ist im Rückzug”(적군이 퇴각 중이다), “Rot ist backbord”(빨강은 좌현이다), “Gott ist”(신은 존재한다), “in China ist Überschwemmung”(중국에 홍수가 났다), “der Becher ist aus Silber”(그 잔은 은으로 만들어졌다), “der Soldat ist im Feld”(그 군인은 출정 중이다), “auf den Ackern ist der Kartoffelkäfer”(밭에 딱정벌레가 있다), “der Vortrag ist im Hörsaal 5”(대형강의실5에서 강의가 있다), “der Hund ist im Garten”(개가 정원에 있다), “dieser Mensch ist des Teufels”(이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다), “Über allen Gipfeln/ Ist Ruh...”(모든 정상 위에/... 고요가 있다)와 같은 사례를 제시하는데,(Heidegger, M., Grundbegriffe, Frankfurt am Main, Vittorio Klostermann, 1980, p. 30) 여기서 계사 ‘ist’가 이와 같이 다양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 의미의 ‘다양성’(Mannigfaltigkeit)을 술어 표현의 ‘단일성’(Einheit) 속에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존재와 시간』이외에도 하이데거가 자아와 자기를 구분하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자기이해(Selbstverständnis)는 결코 반성된 자아경험(Ich-Erfahrung)과 형식적으로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 자기이해는 그때마다의 현존재의 존재양식과 함께 변경된다.”(Martin Heidegger, 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 Frankfurt am Main, Vittorio Klostermann, 1975, p. 249; 이기상 옮김,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문예출판사, 1994) “… 현존재는 자신을 본래적 자기로서 획득하기 위해, 자아성(Ichheit)을 포기할 수 있다.”(Heidegger 1978a, 71) “인간으로서 존재자는 그의 ‘거기에’, 개방됨을 동반하고 있는 자이다. 그 개방됨 안에서 현존재는 명시적으로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으며 상이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일 수 있다. 자기와 자아는 똑같은 것(Gleiche)이 아니다.”(Martin Heidegger, Einleitung in die Philosophie, Frankfurt am Main, Vittorio Klostermann, 2001, p. 148; 이기상․김재철 옮김, 『철학입문』, 까치글방, 2006)

6) ‘자기’의 문제와 관련하여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데거의 관계에 대해서는 슐츠의 논의를 참조하라.(Walter Schulz, “Über den philosophiegeschichtlichen Ort Martin Heideggers”, in Heidegger: Perspektiven zur Deutung seines Werkes, hrsg. Pöggeler, O., Köln, Kiepenheur & Witsch, p. 99)

7) Sören Kierkegaard, Die Krankheit zum Tode, Hamburg, Felix Meiner Verlag, 1995, p. 9; 임규정 옮김,『죽음에 이르는 병』, 한길사, 2006.  

8) 데카르트의 코키토는 물론 단순히 사유함으로써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 즉 사유함으로부터 곧바로 인과적으로 존재함이 도출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헤겔의 부정 개념에 대한 데카르트의 영향을 언급하면서, 데카르트의 cogito me cogitare rem, 즉 “나는 내가 사물을 사유한다는 것을 사유한다”를 검토하는데,(Heidegger 1953, 433) cogito me cogitare rem은 자아가 사물을 사유한다는 것에 대해서 사유하는, 자아의 사유로부터 존재를 정립하는 원리가 된다. 결국 cogito me cogitare rem은 사물을 사유하는 자아 자신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존재를 정립하는 의미한다. 이러한 존재 정립에서는 (자아의 주체적 반성보다 선행적으로 존재하는) 자기의 사물과의 관계맺음과 사물과 관계맺는 자기에 대한 자기관계의 수행적 측면이 은폐된다.

9) Martin Heidegger, 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Logik im Ausgang von Leibniz, Frankfurt am Main, Vittorio Klostermann, 1978b, p. 175.

10) “자기의 방식으로 존재함은 근본적이고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자함’(Zu-sich-selbst-sein)이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한다.”(Heidegger 1978b, 243-4)

11) 하이데거에게서 그와 같은 실체 개념은 ‘존재’와 ‘시간’의 연관을 보지 못한 전통 형이상학의 문제틀에서나 가능한 것일 뿐이다.

12) 물론『존재와 시간』에서는 불안이 근본 심정성으로 규정되지만 『존재와 시간』이후에 행해진 강의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세계-유한성-고독』에서는 불안이 아니라 권태(Langeweile)가 근본 심정성으로 규정된다.

13) 현존재가 일상적으로 세계내부적인 다른 존재자와의 관계맺음을 통해 실존하며 그리하여 배려되고 있는 그 존재자로부터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존재자이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관계맺음은 현존재의 가능성을 통해 이루어는 것으로서, 그의 가능성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존재가 세계내부적인 다른 존재자와의 관계맺음에서 그 존재자에 퇴락한 채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가장 고유한 자기이해를 수행할 때, 비본래적 이해에서 본래적 이해에로 현존재의 존재이해가 변양될 수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키에르케고르의 영향 아래 현존재의 자기를 ‘자기 자신과 관계맺는 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비본래적 존재이해에서 현존재의 존재와 세계내부적인 다른 존재자와의 관계맺음 뿐만이 아니라 본래적 존재이해에서 현존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기 관계를 충족시키고 있다.

14) 하이데거는 지나가버린 것을 의미하는 과거(Vergangenheit) 개념 대신에 존재해오고 있음을 의미하는 기재(Gewesenheit) 개념을 사용한다.

15) Martin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Welt-Endlichkeit-Einsamkeit, Frankfurt am Main, Vittorio Klostermann, 1983, p. 224; 이기상/강태성 옮김,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세계-유한성-고독』, 까치글방, 2001.

16) 그래서 하이데거는 역사성이 시간성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역사성이 시간성에 근거하는 이유는 우선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존재가 시간적이기 때문에 역사적이지, 역사적이기 때문에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17) 순간의 첨단에 대해서는 Heidegger 1983, p. 227 참조.

Posted by Kao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