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1년 6월 24일 진행된 연구공간L 맑스주의 세미나 발제문이다. 이 날 세미나에서 검토한 글은 트로츠키의 『테러리즘과 공산주의』 전반부였다. 발제문을 작성하면서 그전에 연구공간L에서 친구들과 함께 읽은 『연속혁명』에 대해서도 짧게나마 검토하는 부분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연속혁명론’을 비판하는 부분을 발제문에 포함시켰었다. 그런데 트로츠키에 대한 비판에 매몰된 나머지 사실 연속혁명론에서 오늘날 여전히 발전적으로 전개시킬 수 있는, 아니 전개시켜야만 하는 부분을 적극적으로 전유하는 것 없이 단순히 비판을 하는 것으로 연속혁명론을 다룬 것 같다. 우리가 글을 읽고 또 쓰는 이유가 단순히 비판을 하는 것,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단초를 확인하고 그래서 죽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의식하면서도 살릴 수 있으며 또 살려야만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전유하는 데 있다면, 사실상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에 대한 이 발제문은 위의 기준에 비춰봤을 때 너무도 불충분한 작업임을 의심할 수 없다. 세미나에서도 지적됐듯이 특히 이 발제문에서 제시된 연속혁명론에 대한 평가는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에서 제기된 트로츠키의 주장을 연속혁명론에 재투사한 것의 귀결이며, 나아가 이러한 재투사가 『연속혁명』의 합리적 핵심을 오늘날 발본적으로 재전유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됨은 분명하다. 연속혁명론에 대한 이러한 독해가 설혹 연속혁명론을 완전히 오해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은 아닐지 모르나, 그것이 부족한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나저나 내가 쓴 글을 이렇게 스스로 비판한 다음 여기에 게시하려고 하니 조금 멋쩍기는 하다. 트로츠키 형님께서 최고로 도달한 곳에서 형님의 베스트를 전유할 수 있어야 하는데 ... 음 ... 이 작업은 발제문에서도 말했듯이 다음 발제자, 아니 이미 다음 발제자가 발제를 했으니 다다음, 다다다음 발제자에게 우선 맡기기로 하고 일단 나는 오늘 맥주를 한잔 해야겠다. 맥주가 왠지 너무 땡긴다. ㅎㅎㅎ
연구공간L 맑스주의 세미나
트로츠키『테러리즘과 공산주의』에 대한 검토
들어가며
러시아혁명 이후 트로츠키는 카우츠키에 맞서 러시아 소비에트체제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테러리즘과 공산주의』를 작성했다. 따라서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에서는 카우츠키의 비판에 대한 답변으로서 러시아혁명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 프롤레타리아독재, 민주주의, 테러리즘 등에 대한 트로츠키의 시각을 접할 수 있다. 이 글은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에서 제기될 수 있는, 나아가 (비단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트로츠키에게서 일반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몇몇 논점들을 중심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러시아 소비에트체제에 관한 트로츠키의 상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행기에 대하여
『테러리즘과 공산주의』가 발표된 1920년의 러시아는, 트로츠키가 보기에, 1917년 혁명 이후에 아직 사회주의 단계에 진입하지 못한 ‘이행기’에 있었다. 트로츠키는 사회주의에서는 강제기구로서의 국가가 존재하지 않으며 생산과 소비가 코뮌에 완전히 흡수되지만, 사회주의에 이르기 전에 먼저 국가 원칙이 최대로 강화되는 시기, 즉 이행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트로츠키 2009, 236-7; 이하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의 인용은 쪽수만을 표기한다), 국가 원칙이 최대로 강화되는 이행기에는 언제나 비극이 동반된다고 말한다(55). 왜 사회주의에 이르기 전에 비극을 동반한 이행기가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우리의 과제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것이라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을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온전히 집중하고 예외적인 정권이 지배하는 이행기를 두어야 한다(70).
프롤레타리아혁명 이후에,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근거한 자본주의로부터 그 사적 소유의 철폐를 전제로 하는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해서, 이행기가 필요하며, 또 이 이행기에는 프롤레타리아독재에 기초한 국가권력의 강화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행기에서는 왜 국가권력이 강화되어야만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답변을 한다.
인류 역사는 노동을 위해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조직화하고 교육한 역사다. 그 목적은 더 높은 생산성을 달성하는 것이다. [...] 문명의 발전은 인간 노동의 생산성으로 측정된다. 새로운 사회관계는 모두 이러한 검증을 거쳐야 한다(209).
사회주의사회가 자본주의사회 이후의 사회인 한에서 사회주의사회에서의 노동생산성은 자본주의사회의 그것보다 더 높아야만 한다. 물론 연속혁명을 주장하는 트로츠키가 후진적이었던 러시아가 홀로 이러한 높은 노동생산성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1
국가의 폐지와 국가의 사멸을 명시적으로 구분했던 『국가와 혁명』의 레닌이 (부르주아국가를 폐지하는)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과 구분되는 (프롤레타리아국가 혹은 준-국가를 사멸시키는) 일종의 영구적인 사회혁명을 제시한 것과는 다르게(레닌 1988, 30), 트로츠키는 국가권력 강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회주의개혁’에 대해서 말한다(111). (물론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에서 트로츠키가 프롤레타리아국가에서 이루어지는 ‘사회혁명’(168) 개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사실) 습관화에 기초한 사회적 교류의 기본적 규칙들의 습득에 관심을 갖는 레닌과는 달리(레닌 1988, 111), 트로츠키의 관심은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엄격함에 있다. “등불이 꺼지기 직전에 찬란한 빛을 내뿜듯 국가 또한 사라지기 직전에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가장 가혹한 국가 형태를 취한다. 이 형태는 모든 영역에서 시민의 삶에 독재를 행사한다”(237).
물론 레닌과 트로츠키의 위와 같은 차이는 아마도, 혁명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보다는 혁명을 하는 것이 훨씬 즐거운 일이라고 말하면서 『국가와 혁명』의 집필을 중단한 채 10월 혁명에 투신한 1917년의 레닌과, 러시아혁명 이후에 소비에트체제를 카우츠키의 비판으로부터 방어해야 했던 1920년의 트로츠키 사이의 어떤 거리를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우리는 동시에 레닌과 트로츠키라는 두 혁명가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뿐만 아니라, 적어도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으로서의 정치혁명과 그에 뒤따르는 사회혁명으로 전체 혁명과정을 구분․구성한다는 점에서, 즉 국가권력 장악을 최우선적 과제로 요구하는 정치혁명과 궁극적으로 국가 자체를 해체시키는 사회혁명으로 전체 혁명과정을 구분․구성한다는 점에서, 두 혁명가가 일치한다는 점 역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혁명도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이라는 두 단계로 구성되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는 레닌과 트로츠키가 혁명을 두 단계로 구분․구성한 ―사실은 혁명을 그와 같이 구분․구성해야만 했던― 토대 자체가 오늘날에는 사라졌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생산이 단순히 공장 안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생산의 장이 되며, 따라서 자본과 권력이 생존하기 위해 사회적 삶 자체를 포섭해야만 하는 삶권력으로 전화한 오늘날, 정치혁명은 더 이상 국가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자본과 권력에 결박된 사회적 삶을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탈주시키기 위한 투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탈주하며 사회적 삶을 자본과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서 자율적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투쟁이 아닌 국가권력의 장악, 즉 주권 장악을 위한 투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탈근대적 변형에 비춰볼 때 적실한 정치투쟁이 될 수 없다. 오늘날 정치혁명은 사회적 삶을 변형하는 투쟁으로서의 삶정치적 혁명일 수 있을 따름이며, 그래서 삶정치적 혁명으로서의 정치혁명은 사회적 삶 그 자체를 변형하는 투쟁으로서 사회혁명이기도 한 것이다.
연속혁명에 대하여
그런데 오늘날 삶정치적 혁명으로서의 정치혁명이 그 자체 사회혁명이며 따라서 사회혁명과 분리된 정치혁명,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으로서의 정치혁명이 오늘날 적실한 정치적 투쟁이 될 수 없다는 우리의 주장에 비춰볼 때, 트로츠키주의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연속혁명론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연속혁명』의 초판 서문에서 트로츠키는 연속혁명론에는 세 가지의 측면이 통합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연속혁명론의 첫 번째 측면은 민주주의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혁명으로 혁명이 연속적으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이고, 두 번째 측면은 항구적인 내적 투쟁의 과정을 통해서, 즉 사회 내의 다양한 집단들의 충돌을 통해서 사회적 관계가 변화하고 사회가 발전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혁명 자체가 연속적이라는 것이며, 세 번째 측면은 사회주의 혁명이 설사 일국에 기반하여 시작하더라도 결코 일국의 기반 내에서 완성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일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그 자체로 자족적인 것일 수 없는 국제적인 사슬의 한 고리라는 것, 그리하여 사회주의 혁명이 국제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트로츠키 2003, 184-5).
여기서 우리는 사실 트로츠키가 말하는 연속혁명이 국가를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일국의 프롤레타리아독재를 그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민주주의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혁명으로 혁명이 연속적으로 발전한다는 연속혁명론의 첫 번째 측면의 핵심은 사실 (일국으로서의) 후진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정당화하는 데 있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이론[연속혁명론]은, 우리 시대에는 후진적인 부르주아국가의 민주주의과제들은 직접 프롤레타리아독재로 귀결되며, 프롤레타리아독재는 사회주의과제들을 당면 문제로 제기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바로 그것이 이 이론의 핵심 사상이었다. 어느 정도 오랜 기간 동안 민주주의를 거쳐서 프롤레타리아독재에 도달한다는 전통적인 견해와 달리, 연속혁명론은 후진국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길은 직접 프롤레타리아독재로 통한다는 사실을 정립한 것이다(트로츠키 2003, 184).
또 사회 내의 다양한 집단들의 충돌을 통해서 사회적 관계가 발전하며 따라서 사회주의혁명 자체가 연속적 성격을 갖는다는 연속혁명론의 두 번째 측면의 핵심은 사실 (설령 이러한 문제의식이 부재하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그럼에도) 사회적 삶의 혁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프롤레타리아혁명 이후에 국가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주아계급 사이에서 벌어지는 내전의 과정 및 프롤레타리아국가와 제국주의국가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과정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쟁취는 혁명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시작일 뿐이다. 사회주의건설을 국내적․국제적 차원의 계급투쟁을 토대로 해서만 생각할 수 있다. 전 세계에 걸쳐 자본주의적 관계들이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조건에서 이 투쟁은 불가피하게 폭발, 즉 대내적으로는 내전, 대외적으로는 혁명전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트로츠키 2003, 362).
마지막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국제적 성격을 강조하는 연속혁명론의 세 번째 측면은 사실 일국에서의 국가권력 장악이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기반으로서 우선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국민적 무대에서 시작돼 국제적 무대에서 전개되고 결국에는 세계적 무대에서 완성된다”(트로츠키 2003, 362).
이로부터 우리는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이, 그것이 설사 사회주의혁명의 국제적 성격을 강조할지라도, 일국에서의 국가권력 장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독재에 기반해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트로츠키가 견지하는 국제적 시각은 개별 국민국가의 주권에 근거한 국민국가 주권들 사이의 관계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상 트로츠키의 국제적 시각은, 물론 어떤 혁명가도 그가 속한 시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제국주의적 시각을, 그가 비록 침략이 아닌 혁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지언정, 분명 ‘반영’하고 있다. 물론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이 제국주의적 시각을 어떤 점에서는 분명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연속혁명론의 역사적 한계를 말해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이 오늘날의 혁명에서 유효한 무기로 쓰이기 위해서는 그 자체 발본적으로 혁신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연속혁명론을 오늘날의 혁명에서 유효한 무기로 쓰기 위한) 연속혁명론의 발본적 혁신은 사실상 연속혁명론의 핵심 그 자체를 수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프롤레타리아독재에 대하여
이제 트로츠키가 말하는 일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독재에 초점을 맞춰서 논의를 진행하기로 하자. 레닌과 마찬가지로, 트로츠키는 모든 혁명의 근본 문제가 권력, 국가권력의 문제라고 말한다.2 물론 프롤레타리아의 국가권력 장악은 반혁명 세력의 저항을 분쇄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으며, 반혁명 세력의 저항에 맞서는 것은 물리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3 결국 트로츠키의 정식을 따를 때 모든 혁명의 근본 문제는 프롤레타리아의 수중에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반혁명 세력의 저항을 물리적 수단을 동원하여 분쇄하는 것이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적 독재를 수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혁명적 ‘독재’인가? 그것은 설사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더라도 강제성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본질적으로 혁명적 전위의 직접 지배를 뜻하며, 이들은 다수의 대중에게 의존하고 필요할 경우 뒤처진 후미가 선두를 따르도록 줄 세운다. ...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장악한 이후 강제성을 지니게 된다(171-2).
물론 (혁명적 전위의 직접 지배로서의) 프롤레타리아독재가 강제성을 갖는 이유를, 우리는 우리가 앞서 확인한 노동 생산성에 대한 트로츠키의 강조를 통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유일한 방법은 강제노역을 도입하는 것이다(198). 노동의 군사화 방식을 어느 정도 적용하지 않고서 강제노역을 도입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201). 노동의 군사화는 ... 국가 강제를 토대로 삼는다. 국가 강제 없이는 자본주의 경제를 사회주의 경제로 바꾸는 것은 언제까지나 헛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205).
노동의 군사화에 기초한 강제노역의 도입이 자본주의 경제를 사회주의 경제로 바꾸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트로츠키는 동시에 프롤레타리아국가와 (부르주아계급의) 자본주의국가가 분명히 구분된다고 말한다. 어떻게?
부르주아계급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 무기는 종교다. 우리의 무기는 상황을 대중에게 솔직히 설명하고,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지식을 확장하며 국가의 일반 경제계획에 대중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이런 토대를 만드는 데 소비에트 정권의 모든 노동력을 쏟아부어야 한다(213).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맑스 1991, 2)고 말한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의 맑스를 따라 트로츠키는 자본주의국가가 종교적 최면을 통해서 대중을 홀리는 데 반해, 프롤레타리아국가는 대중에게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이를 통해 대중을 각성시킴으로써 대중을 국가의 일반 경제계획에, 아니 나아가 통치의 모든 부분에 참여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질서는 수수께끼였고 우리는 이 수수께끼를 대중에게 풀어주었다. 이제 우리는 대중에게 사회의 수수께끼를 소비에트 질서의 메커니즘 자체로 설명한다. 이를 통해 대중은 통치의 모든 부분에 참여한다(213).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프롤레타리아독재가 ‘독재’인 한에서, “독재는 의지의 통일, 방향의 통일, 행동의 통일을 전제”하며,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지배는 프롤레타리아 내부에서 정당의 정치적 지배를 전제”한다(169). 물론 이 당, 즉 공산당이 명확한 행동강령과 흠 없는 내부규율을 지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169). 공산당은 계급의식이 가장 투철하고 헌신적인 성원만을 포함하며, 구성원을 확대할 때는 반드시 신중한 선별과정을 거친다(171). 그리고 공산당은 노동자계급 전체가 인정하는 대의기구로서(170), 모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최종 결정권을 갖는다(168).
여기서 우리는 노동자계급 전체의 대의기구이자, 모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최종 결정권을 갖는 공산당의 대의성과 강제성에 기초한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적어도 어떤 점에서는 그것의 대척점에 있는 형식적 민주주의와 사실상 유사한 것이지 않은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지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의 서문으로 작성된 「트로츠키의 『테러리즘과 공산주의』 또는 격동기 1920년의 절망과 유토피아」에서 지젝은 ‘독재’라는 용어를 정확한 의미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형식의 측면에서 볼 때 민주주의 또한 독재의 한 형태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독재’라는 용어는 정확한 의미로 써야 한다. 형식의 측면에서 볼 때 민주주의 또한 독재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 아무리 ‘자유로운’ 선거라도 이를 정당화하고 조직하는 법적 절차, 선거과정을 (필요하다면 강제로) 보장하는 국가기구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제도적 측면에서의 국가는 이익의 대리라는 관점에서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다. 이러한 설명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이다(지젝 2009, 22-3).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민주주의독재(?)의 강제성과 프롤레타리아독재의 강제성은 다르다. 민주주의독재의 강제성이 법적 절차, 선거 과정을 필요하다면 강제로라도 보장하는 국가기구 자체를 문제삼을 수 없다는 점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트로츠키가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의 강제성은 무엇보다도 명확한 행동강령과 흠 없는 내부규율을 지닌 공산당의 정치적 지배의 강제성이다. 그렇다면 대의성은 어떠한가. 강제성과 마찬가지로 의회민주주의의 대의성과 공산당의 대의성 역시 물론 분명히 다르다. (앞서 확인하였지만) 노동자계급 전체의 대의기구로서의 공산당은 계급의식이 가장 투철하고 헌신적이며 오직 신중한 선별과정을 거친 프롤레타리아‘전위’로만 구성되며, 그래서 허구적으로 유권자의 여론을 반영하는 의회주의적 대의와는 달리 프롤레타리아독재에서의 대의는 프롤레타리아전위에 의한 노동자계급 전체의 대의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공산당의 정치적 지배의 대의적 성격과 강제적 성격을 보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공산당의 강제성은 (노동자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일반을 대의하는) 선진적인 프롤레타리아전위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일반 및 농촌의 하위중간계급으로서의 농민 그리고 도시의 하위중간계급에 대한 정치적 지배의 강제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공산당의 정치적 지배의 강제성은 (프롤레타리아전위가 대의하는 노동자계급인) 프롤레타리아 일반뿐만 아니라 도시의 하위중간계급 및 특히 농민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상 이론적인 수준에서도 프롤레타리아(전위)와 하위중간계급, 특히 농민과의 관계는 강제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대의의 관계는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전위)와 농민의 관계에 대한 트로츠키의 문제의식을 『연속혁명』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연속혁명』에서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관계에 대한 레닌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근본적으로 일치함을 확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레닌은 ... 독자적인 농민 정당이나 특히 혁명 정부에서 농민 정당의 지배적 역할과 같은 관념을 배제하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즉, 프롤레타리아가 농민을 지도하고 그들에게 지지를 받으며, 결국 혁명권력은 프롤레타리아 당의 수중에 집중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연속혁명론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트로츠키 2003, 266; 강조는 트로츠키).
프롤레타리아전위의 당으로서의 공산당은 농민을 지도하고 농민의 지지를 받는 것이지 농민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독재가 특히 하위중간계급과 농민에 대해 별도의 합의나 상당한 양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만(70-1), 중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이러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권력기구를 소유하고, 사회주의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양보할 부분과 고집할 부분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71).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다시금 트로츠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와 민주주의독재가 과연 얼마나 상이한 것인가라고 되물을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독재에서는 프롤레타리아전위와 일반대중 사이의 정치적 지배-피지배 관계가 너무도 분명히 존립하며,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독재는 프롤레타리아전위에 의한 일반대중의 사실상의 일방적 종속의 체제이지 않은가? 프롤레타리아독재와 민주주의독재의 강제성은 분명 다르지만 프롤레타리아독재에서의 (프롤레타리아전위-일반대중 사이의) 지배-피지배 관계는 형식적 민주주의에서의 (대의하는 자-대의되는 자 사이의) 지배-피지배 관계와 ‘형식적으로’ 너무도 유사하지 않은가? 물론 우리가 형식적 민주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독재에서도 지배-피지배 관계가 어떤 점에서는 분명 유지된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혁명에 뒤따르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민주주의’의 ‘내용’ 자체를 혁신하고자 했던 트로츠키의 긍정적 측면(및 나아가 그 한계)을 너무나 손쉽게 판정해 버리는 것일지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문제를 검토하면서 다시 확인하기로 하자.
세력균형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수립은 프롤레타리아가 의회민주주의적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다. 프랑스, 영국 등의 민주주의가 건전하고 정상적이고 평화롭게 사회주의의 발전을 가져오리라고 보는 카우츠키에 맞서 트로츠키는 카우츠키의 이러한 생각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면서(56), 의회민주주의적인 편견에 단호히 맞서는 것이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쟁취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59).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의 비판은 혁명적 투쟁을 ‘세력균형’에 기초하여 사유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의 비판을 살펴보기 전에 트로츠키가 왜 ‘세력균형’에 의존하여 혁명적 투쟁을 사유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를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다.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의 1장은 <세력균형>인데, 여기서 트로츠키가 말하는 세력균형은 물론 정치적 세력균형이다. 정치적 세력균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트로츠키는 세력균형을 “이른바 현실주의 정치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정치적 인상을 요약한 것”(62)이라고 말하는데, 이로부터 우리는 세력균형이 현실적인 정치권력들 사이의 역力관계에 대한 표상을 말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혁명적 투쟁이 이러한 현실적 역관계에 대한 표상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일견 혁명적 투쟁에 대한 트로츠키의 사유에서 어떤 긍정성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갖는다. 그것은 혁명적 투쟁이 현실적 역관계에 대한 표상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 즉 현실성에 기초하여 우리가 혁명을 사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력 균형에 따라서 현실권력들 사이의 역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관계를 단순히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이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의 문제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것, 그래서 어떤 발본적인 새로움을 낳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혁명은 현실적인 항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따라서 그 자체 실재하는 것이지만 현실적인 것처럼 실재하지 않는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력 균형에 기초해서 혁명적 투쟁을 사유해서는 안 된다고 트로츠키가 말했을 때, 일견 트로츠키가 혁명을 어떤 단순한 현실성에 기초해서 투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을 우리는 갖게 된다. 그렇다면 트로츠키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세력 균형을 넘어서 있는 혁명의 조건으로 사유하고 있는가?
역사발전의 결정적 요인인 생산의 거대한 힘은 상부구조의 낡은 제도(사적 소유와 국민국가)에 질식했다. 이들은 이전 발전에 발목이 잡혀 있다. 자본주의가 낳은 생산력은 모든 부르주아 국민국가의 문을 두드리며 경제활동을 전 지구적 규모에서 사회주의적으로 조직하여 자신을 해방시켜달라고 간청했다(66).
트로츠키가 주목하는 혁명의 조건은 당대 생산력의 거대한 발전이며, 이로부터 우리는 생산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트로츠키에게서 혁명의 조건이자 핵심이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현재 인류가 겪는 불행의 원인은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의 기술이 발전하여 경제활동을 사회화할 만큼 성숙한 지 오래되었다는 데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생산에서 독재를 완벽하게 보장하는 지위를 차지했다(67).
반복하건대,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핵심적 조건을 정치적 세력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낳은 생산력의 발전에서 찾고 있다. 생산력의 발전에 주목하는 트로츠키의 문제의식은 확실히 트로츠키의 국제주의적 시각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트로츠키가 일국의 국가권력 장악이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프롤레타리아의 연속혁명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요구된다고 이해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트로츠키가 설령 혁명의 조건을 세력균형이 아닌 생산력의 발전 속에서 찾으면서도 동시에 이를 전적으로 주권적 틀 안에서 사유하고 있다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현실적인 정치적 세력관계를 넘어서 혁명을 사유하고자 했던 트로츠키로부터 혁명을 잠재성의 코뮤니즘과 그것의 현실화로 파악했었던 어떤 흔적을 확인하는 것은 무리이지 않을까? (나아가 트로츠키가 전제하는 주권적 틀 안에는, 그것이 설사 프롤레타리아주권일지라도, 이미 자본-임노동 관계가 아닌 프롤레타리아국가-임노동 관계의 싹이 이미 배태되어 있다고 말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민주주의에 대하여
전술했듯이, 혁명적 투쟁이 세력균형, 현실의 역관계에 대한 표상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는 트로츠키의 생각은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과 맞닿아 있다. 트로츠키는 과거에는 의회선거가 세력균형을 충분히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여겨졌었지만 제국주의전쟁으로 인해서 이러한 낡은 기준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말한다(64). 의회민주주의를 물신으로 숭배하는 카우츠키에게, 트로츠키는 의회민주주의가 합법적 허구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회주의라는 합법적 허구에 따르면, 보통선거권은 국가 내 모든 계급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의지를 나타내며, 그 결과 국민 대다수를 사회주의로 끌어들일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론적인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는 한, 사회주의 소수당은 부르주아 다수당에 복종해야 한다. 의회 다수당이라는 이러한 물신숭배는 프롤레타리아독재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을 모조리 거부하는 짓이다. 이론상, 사회주의 정책을 다수당과 소수당이라는 의회주의 신화에 종속시킨다면 형식적 민주주의가 전파된 나라에서는 혁명투쟁이 불가능하다(71).
트로츠키가 보기에 의회의 다수당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물신숭배는 혁명을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혁명은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있다. 왜 그러한가? 형식적 민주주의를 통해서는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에게 권력을 집중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4
물론 트로츠키가 민주주의를 무조건적으로 그릇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트로츠키는 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유효한 역할을 담당했던 때가 있었다고 말한다. 가령 봉건제 사회의 계급적 특권에 대항하면서 모두가 평등한 선거권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봉건제에 대항하는 구호로서 진보적인 성격을 가졌었다(90-1). 문제는 트로츠키 당대의 형식적 민주주의 이론이 노동자대중과 혁명정당의 현실적 요구를 통제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부르주아적 정당성이라는 형태로 노동자의 의식 발전을 제한하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서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가졌는데 어떻게 노예 상태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91).
여기서 민주주의가 부르주아적 정당성의 형태로 노동자의 의식 발전을 제한한다는 트로츠키의 주장은 사실 의회민주주의에서는 인구의 다양성이 일인일표에 근거한 동일성으로 환원된다는 문제의식의 표현으로 읽을 수 있다. 즉, 의회민주주의가 대의라는 허구를 통해서 인구를 민중으로 통일시켜서 주권에 연결시키지만 이러한 연결은 사실 정당화라는 허구에 기초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부르주아주권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트로츠키는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트로츠키의 다음과 같은 언명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무지렁이 농부는 이름도 쓸 줄 모르고, 입던 옷 그대로 자며, 두더지처럼 떠돌아다닌다. 하지만 그는 나라의 주권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법정과 투표소에서 로트실트와 같은 권리를 행사한다. 삶의 실제 조건, 경제적 과정, 사회관계, 생활양식 면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불평등해졌다. 한쪽에서는 엄청난 부가 쌓이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가난과 절망이 더해갔다. 하지만 국가의 법적 체계의 영역에서는 이런 확연한 모순이 사라졌다. 비본질적인 법의 그늘로 숨어든 탓이다. 지주, 노동자, 자본가, 프롤레타리아, 성직자, 구두닦이, 이들은 모두 ‘시민’이자 ‘입법권자’로서 평등하다.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적 평등은 하늘에서 한 단계 내려와 민주주의의 ‘자연적’ ‘법적’ 평등의 형태를 띠었다. 하지만 아직 땅에는 닿지 않았다. 그리고 사회의 경제적 토대는 땅에 있다. 평생 부르주아를 위해 짐말 노릇을 하는 무지한 일용직 노동자에게 의회선거를 통해 나라의 운명에 영향에 미치는 이상적인 권리란 하늘나라에 약속된 궁전보다 더 비현실적이다(92).
형식적 민주주의는 무력하고 쓸모없고 기만적일 뿐이다(56). 중요한 것은 트로츠키의 이러한 문제의식이 지향하는 지점이다. 이는 소비에트체제를 검토할 것을 요구하는 데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아마도 유일한 구절에서, 트로츠키는 의회주의와 소비에트를 비교하며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의회민주주의보다 우월한 것으로 설명한다.
의회주의정권은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에도 국가의 여론을 파악하는 데는 다소 불충분한 방법이었으며, 혁명의 폭풍이 몰아치는 시기에는 투쟁의 과정과 혁명적 의식의 발전을 따라잡을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하지만 소비에트정권은 노동하는 다수 국민과 더 가까이, 더 직접적으로, 더 정직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다수를 반영할 뿐 아니라 그 다수를 역동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혁명적 독재의 길을 선택한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농민의 표를 좇아 색깔을 바꾸는 정당들과 은밀히 경쟁하기보다는, 노동자 대중의 진정한 이익을 위해 국가를 통치하는 과업에 프롤레타리아와 농민 대중을 끌어들이는 쪽에 정책의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의회주의보다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98).
여기서 트로츠키는 소비에트정권이 의회주의정권보다 대중과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통계적으로 다수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다수를 역동적으로 만들어 낸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다수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다수를 역동적으로 만들어 내는 소비에트체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트로츠키의 다음과 같은 언명에서 우리는 소비에트체제에 대한 트로츠키의 상을 접할 수 있다.
보편적 노역을 체계적으로 적용하고 중앙집중화된 분배기구를 활용하여, 이 나라의 모든 인구가 경제계획과 자치라는 일반적인 소비에트체제에 참여할 것이다. 소비에트는 지금은 통치기구이지만 차츰 순수한 경제조직으로 바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사회주의사회의 현실 조직 위에 제헌의회라는 낡은 왕관을 씌우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제헌의회 이전에, 제헌의회 없이 이미 모두 구성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100).
여기서 트로츠키는 소비에트가 현재는 통치기구이지만 차츰 순수한 경제조직으로 바뀔 것이라는 점, 사회주의사회에서는 제헌의회가 더 이상 불필요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사회주의사회에서 제헌의회가 불필요하게 되는 이유는 모든 인구가 참여하는 소비에트가 대중의 ‘경제적 삶’을 조직하는 자치기구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경제적 자치기구인 소비에트가 사회주의사회에서도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고 본다. 그것은 소비에트보다 상위의 기구인 (일반적인 통제권을 갖는) 공산당(168)과 (노동규율울 조직하는) 노동조합(172)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사회에서도 소비에트보다 상위의 기구인 공산당과 노동조합의 존재를 상정하는) 소비에트에 대한 트로츠키의 위와 같은 상은 「혁명의 한 가지 근본 문제」에서 제시된 레닌의 소비에트에 대한 상과의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권력을 소비에트에게로”는 낡은 국가 기구 전체, 민주주의적인 모든 것을 방해하는 관료적 기구를 근본적으로 개조한다는 뜻이다. 이 기구를 없애고 그것을 새로운 인민의 기구, 즉 진정으로 민주적인 소비에트 기구, 조직되고 무장한 인민 다수 ―노동자, 병사, 농민― 로 대체한다는 뜻이다. 대표의 선출만이 아니라 국가 행정을 담당하고, 개혁을 비롯한 다양한 다른 변화를 이루어내는 일에서도 인민 다수에게 주도권과 독립성을 허용한다는 뜻이다(레닌 2008, 171)
권력을 소비에트로 옮김으로써 러시아의 행정과 경제적 통제를 노동자와 농민의 손으로 완전하게 이양한다는(레닌 2008, 178) 소비에트에 대한 레닌의 상과 비교해보면, 소비에트에 대한 트로츠키의 상은 사실상 후퇴한 것이다.5 그래서 우리는 의회민주주의를 넘어서고자 한 트로츠키의 도달점이었던 사회주의사회의 소비에트 민주주의에서 과연 인민 다수의 주도권과 독립성이 얼마나 허용되는 것인지, 달리 말하면 인민 다수의 구성적 역능을 사유함으로써 의회민주주의보다 진정으로 한발 더 나아간 민주주의의 단초를 과연 트로츠키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테러리즘에 대하여
형식적 민주주의를 통해서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트로츠키는 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것에 호소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또 유지하고자 한다. 트로츠키가 호소하는 것은 혁명적 테러이다. 프롤레타리아 지배를 보장하려면 부르주아계급에게 프롤레타리아독재에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가르쳐야만 하며(72),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지배를 실제로 보장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무장 반혁명에 대한 억압과 위협 조치로서의 테러리즘을 거부하는 것은 그래서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지배와 혁명적 독재를 실제적으로 거부하는 것과 같다(73).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해서 테러리즘이 요구되는 것이다.
혁명이 온갖 수단을 써서 목표를 달성하는 혁명계급을 필요로 하며 또 혁명계급은 필요시 무장봉기를 동원할 수 있는 한에서(112), 트로츠키는 혁명계급의 테러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형태의 폭력, 모든 전쟁, 모든 봉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말한다(113).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한 만한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트로츠키가 총파업과 무장폭동으로서의 적색 테러를 구분한 다음 총파업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그리하여 무장폭동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총파업은 프롤레타리아를 동원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아의 적인 국가에 대항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파업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적들보다 프롤레타리아의 역량이 더 빨리 소진되는 탓에 노동자들이 조만간 공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총파업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순간은 프롤레타리아와 적의 무장세력의 충돌, 즉 노동자들의 전면적인 혁명적 봉기를 준비할 때뿐이다. ... 총파업은 양측을 다 동원하며, 반혁명 저항세력의 힘을 가능해볼 수 있는 최초의 기회다. 하지만 혁명계급이 권력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피의 대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으려면 무장폭동을 거쳐 투쟁 단계에 들어서야 한다(75).
총파업만으로는 국가 권력을 장악할 수 없으며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무장봉기, 테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만 테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혁명 이후에도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호시탐탐 전복시키고자 하는 부르주아계급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국가테러가 필요하다.
혼돈의 첫 시기가 지난 뒤, 이전에 러시아를 지배하던 계급의 저항이 필사적으로 변해가고, 어마어마한 위험과 외국의 공격, 국내의 음모와 폭동 때문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가 국가 테러라는 엄중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11).
그래서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가 사실상 테러체제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투쟁의 잔인성은 국내외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몰아낸 계급의 적이 더 잔인하고 위험하게 저항할수록, 억압체제는 더욱더 테러 체제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108).
여기서 우리는 트로츠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가 부르주아계급에 대한 공공연한 국가테러에 기반한 체제임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수립하고 또 유지하기 위해서 테러가 필요하다고 트로츠키가 말할 때, 트로츠키가 말하는 테러는 대항폭력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혁명 이전에는) 부르주아계급의 국가폭력에 맞서서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수립하고자 하는 폭력이자, (프롤레타리아혁명 이후에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부르주아계급에 대한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트로츠키가 말하는 대항폭력으로서의 테러가 사실상 부르주아국가의 국가폭력과 동질적인 폭력일 뿐이라는 점이다. 양자의 차이가 있다면 폭력의 주체가 부르주아주권에서 프롤레타리아전위로 바뀌었다는 점뿐이다.
그렇다면 대항폭력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적색 테러의 역사적 귀결은 무엇이었는가? 프롤레타리아의 적색 테러는 부르주아 국가주권이 행사하는 폭력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예속시키는 또 다른 주권을 탄생시켰고 또 (트로츠키의 애초의 예상과는 달리 그 주권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강화시켰다. 프롤레타리아의 대항폭력은 주권을 해체시키는 것이 아니다. 주권을 해체시키는 대신 프롤레타리아의 대항폭력은 또다른 주권을 탄생시키고 또 강화시킬 따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의 대항폭력이 어떤 발본적인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현실적인 항을 창조할 때에만 비로소 도래할 수 있을 잠재성의 코뮤니즘이 대항폭력을 통해서는 결코 현실화될 수 없다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마치며
지금까지 우리는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몇몇 논점들을 중심으로 트로츠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러시아 소비에트체제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물론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에 대한 우리의 검토는 우리가 오늘날의 혁명을 위해서 트로츠키로부터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혹은 읽어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수행된 것이었었다. (아니 사실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가 결국 확인한 것은 트로츠키의 사유와 오늘날의 혁명 사이의, 쉽게 좁히기 힘든 간극인 것 같다. 물론 그만큼 트로츠키에 대한 진정으로 창조적인 재독해의 과제가 (다음 발제자에게) 남아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L>
※ 참 고 문 헌 ※
레닌 (1988) 『국가와 혁명』, 김영철 옮김, 논장.
레닌 (2008) , 「혁명의 한 가지 근본 문제」, 정영목 옮김, 『지젝이 만난 레닌』, 교양인.
맑스 (1991)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최인호 옮김,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박종철출판사.
조정환 (2008) 「레닌의 제헌권력, 그 열림과 닫힘」, 『레닌과 미래의 혁명』, 그린비.
지젝 (2009) 「트로츠키의 『테러리즘과 공산주의』, 또는 격동기 1920년의 절망과 유토피아』, 노승영 옮김, 프레시안 북.
트로츠키 (2003) 『연속혁명』, 정성진 옮김, 책갈피.
트로츠키 (2009) 『테러리즘과 공산주의: 카를 카우츠키에 보내는 답변』, 노승영 옮김, 프레시안 북.
- “... 하나의 전체로서 세계 경제는, 그리고 특히 유럽 경제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충분히 성숙해 있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것인가, 어떠한 속도로 그리고 어떠한 단계를 거쳐서 사회주의에 도달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유럽과 세계 자본주의의 운명에 달려 있을 것이다”(트로츠키 2003, 180). [본문으로]
- “모든 혁명에서 관건이 되는 문제는 의심의 여지 없이 국가 권력의 문제다. 어느 계급이 권력을 쥐는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레닌 2008, 169). “혁명계급은 자신을 향한 적의 의지를 깨뜨리지 않고서는 권력의 문제, 즉 모든 혁명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75). [본문으로]
- “... 회의․논쟁․의회와 달리, 혁명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쟁보다는 온건하지만 어쨌든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한다”(108). [본문으로]
- 트로츠키는 정치적 용어로서의 민주주의가 첫째, 보통선거권을 비롯하여 공식적인 인민정부의 특징을 기초로 하는 국가체제이자 둘째, 정치적 존재로 살아가는 인민대중 자체를 뜻한다고 말하면서, 첫 번째 뜻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뜻에서도 민주주의의 의미는 계급 구분을 뛰어넘는다고 말한다(83). 따라서 트로츠키가 민주주의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단적인 이유는 민주주의를 통해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에게 권력을 집중시킬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우리는 권력을 프롤레타리아에게 집중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거부[한다]”(82). [본문으로]
- 물론 우리는 아마도 소비에트에 대한 레닌의 위와 같은 상이 레닌 자신에게서도 한결같이 유지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조정환 2008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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