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정원2018. 3. 9. 07:22

*아래는 P2P 재단의 블로그에 실린 미셸 보웬스(Michel Bauwens)의 글 “If we can have p2p economics, why not p2p spirituality”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은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Share Alike 3.0 Unported License를 따른다. 이 글은 원래 open democracy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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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P 경제가 가능하다면, P2P 영성(spirituality)이 불가능할 이유가 있는가?

 

옮긴이: 카오모


컴퓨터에 사용되는 지식·소프트웨어·코드가 자기조직적인 개인들의 공동체에 의해 피어생산(peer produce)되는 것처럼 영적 경험과 통찰이 공동생산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영성은 우리가 사는 시공간에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세계관들로 이루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새로이 출현하는 영적 관점과 영적 실천은 새로운 사회문화적 복잡성을 다룰 수 있게 해주는 필수적인 의식의 진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함의는 심대하다.

영성과 종교는 항상 그것들이 태어나고 뿌리내린 사회구조의 특징을 담지한다. 새로 출현하는 종교들이 의식의 새로운 형태를 재현한다는 점에서 종종 사회구조의 부분적 변형을 재현하더라도, 주류 사회논리에 뿌리내리고 그 논리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결코 헤게모니적이 될 수 없다. 

예컨대 우리는 가톨릭과 불교교단의 조직구조와 이념에 강한 봉건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혹은 개신교가 출현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그리고/혹은 민주주의적 형태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혹은 종종 뉴에이지 영성”(New Age Spirituality)이라 불렸던 것이 상품화된 영적 경험이 판매될 수 있는 시장에 맞춰 고안된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가톨릭과 불교교단이 각각 로마의 정치질서와 노예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가치창조와 가치분배의 새 모델로 나타난 피어생산 역시 영적 조직과 영적 경험의 새로운 형태를 낳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분명 타당하다.

피어생산 혹은 ‘P2P’는 개방적 투입과 참여적 절차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과정으로 정의되는데, 여기서는 산출물을 누구나 커먼즈(공통재)로 이용할 수 있다. 이 정의는 P2P 영성에도 적용될 수 있는 다수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첫째 영적 공동체는 그 기본적 규칙과 지침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적이어야 한다. 둘째 중앙의 기획과 신념을 부과할 수 있는 미리 수립된 위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셋째 영적 지식은 저작권이 부여되거나 사유화될 수 없다.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말이다.

다른 모든 낡은 형태들과 구분되는 P2P 영성의 핵심적인 긍정적 윤리적 가치는 잠재력 균등성”(equipotentiality)이라 불려온 것에 뿌리내리고 있다. 잠재력 균등성은 모든 인간 존재가 가진 자신의 자질을 개발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이 자질들은 공통의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데 모두 필요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보완이 되는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잠재력 균등성은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영적 형태를 오염시킨 순위매기기 방법론에 대한 필수적 해독제이다. 스페인의 트랜스퍼스널 심리학자인 호르헤 페레르(Jorge Ferrer)에 따르면 비교하는 마음은 언제나 서로 간에 더 높거나 더 낮게 순위를 매기게 되는 위계의 필수불가결한 기반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통합적인 체화된 영성은 쉽사리 경쟁·대립·시기·질투·대결·증오를 낳는, 비교에 기반한 현재의 인간관계 모델을 효과적으로 약화시킬 것이다. 개인들이 그들의 가장 순수한 활력으로 조화롭게 발전할 때 상호교류와 상호증진으로 특징지어지는 인간관계가 자연스레 출현할 것인데 이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그들 자신의 욕구와 결핍을 투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분명히 말하면 비교하는 마음을 중지하는 것이 영적 집단들에 역설적으로 그토록 퍼져 있는 광범위한 위계적 상호작용 양식을 해체할 것인데, 이 집단들에서는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다른 이들을 전체적으로 혹은 몇몇 특권적 측면들에서 우등하거나 열등하다고 본다.”

이와 달리 모든 각각의 개인들은 다양한 속성·강함·약함의 집합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것들 각각에서 다른 이들보다 못할 수도 있고 나을 수 있다. 핵심은 모든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최고의 기술과 자질이 공통의 프로젝트에 기여할 수 있고 그러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피어생산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이와 같은 것이 P2P 영적 프로젝트에도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적 성취를 다른 모든 이들을 능가하는, 한 사람에게 무소불위의 권위를 부여하는 초월적 자질인 깨달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위대한 음악가나 예술가에게 어떤 특별한 힘을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존경하는 것처럼 영적 성취를 존중받을 만한 특별한 기술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사조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특정의 일을 맡는 솜씨 좋은 선생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선생들은 기술적 조력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은 특수한 기능을 담당하는 재능있는 동료들이다.

필연적으로, 이러한 접근법에서는 영적 탐구의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존 헤런(John Heron)이 발전시킨 협동적인 영적 탐구 집단들이 이러한 방법론의 실제적인 좋은 사례이다. 이 집단들에서 영적 탐색은 영적 경험이 쉽게 출현하도록 하는 특정한 실험들과 명령들을 집단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여기에 미리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경험 많은 선() 선생을 초청하여 명상 수행을 이끌도록 할 수는 있지만, 참여하는 모든 개인들은 그들의 상호 이해와 배움을 키우고자 집단 내 다른 이들과 그들의 경험을 공유할 것이다. 위계적 집단의 영적 실천과 달리 특정 경험의 선험적 타당성이란 없으며 다른 경험들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경험이 존중되며 집단적으로 의미를 만드는 경험의 일부가 된다. 

과거에는 영적 탐구자들이 다음의 두 가지 사이에서 즉 수평적·공통적 측면이 대체로 위계 속에 통합되어 있던 전통적인 종교적 구조들과 종종 꽤나 자기도취적이었던 더 개인주의적인 뉴에이지 버전들 사이에서 선택해야 됐는데, 후자의 버전들은 (종종 돈과 교환되는) 영적 경험의 획득에 기초하지 수평적 관계에는 미약하게만 근거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P2P 영성은 무엇보다도 공동체와 공동생산을 존중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시사하는 바는 내가 기여적’(contributory)이라 부르는 영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다. 이 접근법은 각 영적 전통을 가부장제, 배타적 진리론 같은 특정 시대와 연관된 가치들에 영향받는 특정한 사회틀 내의 일단의 명령들로 이해한다. 동시에 각 전통은 우리와 우주의 관계에 관한 특정 진리를 표현하는 심적·영적 실천의 중요 부분 또한 포함한다. 이러한 영적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최소한 이러한 실천들에 부분적으로나마 노출되는 것을, 아울러 다른 이들로부터의 상호주관적인’(inter-subjective) 피드백을 받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이는 홀로 착수할 수 없는 탐색이며, 같은 길 위에 있는 다른 이들과의 공유를 필요로 한다.

이런 접근법에서는 전통이 거부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비판적으로 경험되고 평가된다. 기여적인 영적 실천가는 스스로를 특수한 전통에 빚지고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지만 그가 그 전통에 구속되어야 한다고 느낄 필요는 없다. /녀는 열린 마음으로 다른 전통들에 다가가며 그것들을 개별적·집단적으로 경험하고 다른 이들과 경험을 교환하는 영적 탐구 집단들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집단들을 통해서 영적 경험의 새로운 집단적 신체가 탐구하는 영적 공동체 및 개인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공동으로 창조될 수 있다. 영성의 공동생산에 P2P 거버넌스P2P 소유관계를 더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미래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는 예시적 실천들을 발명할 수도 있다. 새로이 출현하던 기독교 문명의 뿌리가 된, 새로운 기독교 주체성을 발명했던 가톨릭 수도승처럼 P2P 영적 실천자들은 출현하고 있는 P2P에 기반하고 커먼즈로 향해있는 사회를 공동으로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의 귀결은 공동으로 만들어낸 실재일 것이다. 이 실재는 예측불가능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이 모든 인류가 이용할 수 있는 영적 지식의 커먼즈에로 이끄는, 개방적이고 참여적인 접근일 것이라는 점이다

Posted by 카오모
번역정원2018. 3. 9. 07:14

*아래는 P2P 재단의 블로그에 실린 캐머런 네일란(Cameron Neylon, 커먼즈 전략 그룹)의 글 Patterns of Commoning: Open Access Pioneer: The Public Library of Science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플로스(PLOS)의 전() 옹호국장(Advocacy Director)인 네일란은 인터넷을 과학을 위한 도구로서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연구를 위한 웹 기반 도구의 설계 등에 대해서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이 블로그의 글들은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Share Alike 3.0 Unported License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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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액세스의 개척자: 과학 공공 도서관(The Public Library of Science)

 

옮긴이: 카오모

 

1990년대에 노벨상을 수상한 유전학자 해럴드 바머스(Harold Varmus)와 캘리포니아 과학센터의 과학자 패트릭 브라운(Patrick Brown), 마이클 아이센(Michael Eisen)은 과학연구를 공유하는 데 가해지는 많은 제약으로 인해 점점 더 좌절을 겪었다. 학술 연구자들이 (상당수가 납세자들에 의해 재정지원을 받는) 돈이 많이 드는 어려운 과학연구를 하고 같은 전공자로서 연구물에 대해 리뷰를 하는 사람들임에도 상업적인 학술지 출판사들은 보통 출판된 결과물의 저작권을 요구해왔다. 그 결과 출판사들은 도서관들로서는 종종 감당할 수 없는 구독료를 부과하고 연구논문들에 접근·복사·공유하는 사람들의 권한에 법적 제한을 가할 수 있었다. 구독료는 10년 넘게 인플레이션율 이상으로 오르고 있으며 미국 대학들은 이제 학술지들에 연간 100억 달러 이상을 쓴다. 심지어 하버드대 같은 가장 부유한 기관들조차 이를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1 

이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서 바머스와 그의 동료들은 세계 전역의 과학자들에게 그들 논문의 전문을 모두가 무조건적으로 즉각 혹은 몇 달 간의 타당한 지연이 있은 다음에 이용하는 것을 막는 학술지들에는 더 이상 논문을 내지 않겠다고 서약하기를 청하는 온라인 청원서를 내놓았다. 또한 그들은 더 이상 그러한 학술지들을 구독하거나 그러한 학술지들을 위해 리뷰를 쓰지 말 것을 과학자들에게 촉구했다.2

그에 대한 응답은 신속했고 놀라웠다. 180개국 34,000명 이상의 과학자들이 그 공개 청원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서명자들이 청원서의 목표를 실질적으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이 곧 분명해졌는데, 그 이유는 논문들을 실제로 제공하거나 논문들에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출판물들이 너무나 적었기 때문이었다.

이 간극을 메우고자 바머스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과학 공공 도서관’(www.plos.org)으로 알려진 새로운 출판벤처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논문들을 모두가 영구적으로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오픈 액세스 출판 매체를 제공함으로써 과학자들과 연구자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연구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도록 하는 것이었다. 원저자는 저작권을 가지며 자유로운 재사용·공유·배포가 가능하도록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어트리뷰션 라이센스(Creative Commons Attribution license) 하에 논문을 공개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에 관한 에세이를 보라.) 이 프로젝트는 런던에 기반을 둔 기업가 바이텍 트라츠(Vitek Tracz) 1990년대 후반의 다른 혁신적 출판업자가 유사한 목적으로 주도했던 출판벤처인 바이오메드 센트럴(Biomed Central)의 개발을 참조하여 이루어졌다.

2003년 설립된 이래 플로스(PLOS)는 공동체의 저항에서 시작하여 자유롭게 읽을 수 있고 직접적으로 접근가능하며 공개적으로 인준된 학문적 내용을 담은 세계 최대의 출판사로 성장했다. 최초의 플로스 학술지인 플로스 생물학(PLOS Biology) 2003년 말에 첫 논문들을 출판했으며 순식간에 양질의 논문들로 명성을 얻었다. 그 다음 수년 간 그 프로젝트는 플로스 의학(PLOS Medicine)과 계산생물학, 유전학, 병원균, 도외시된 열대성 질환 분야의 연구에 각각 초점을 둔 네 학술지를 내놨다.

이 여섯 개의 학술지가 성장하면서 설립자들은 학적 소통에서의 변화를 촉진한다는 본래의 더 야심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 목표로 나아가는 그 다음의 중요한 단계는 과학 전체를 포괄하기 위해 그리고 과학지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개척하기 위해 2006년에 새로운 과학지 플로스 원(PLOS ONE)(www.plosone.org)을 만든 것이었다. 처음으로 출판되는 논문 수에 가해지는 어떠한 인위적 제한도 없게 되었다. 투고된 논문들은 예견되는 파급력이 아니라 과학적 타당성과 기술적 질을 기반으로 검토되었다. 관행적으로 연구자들은 가장 까다로운 학술지에 게재함으로써 갖게 되는 명망을 추구해왔는데, 이것이 이제 학술지의 명망이 논문의 질보다 더 중요하게 되어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논문 저자와 편집자 양자로 하여금 주의 깊은 증거를 제공하기보다는 가장 선정적인 주장을 하거나 그런 주장을 뽑는 비뚤어진 동기를 낳을 수 있다. 플로스 원은 적절하게 수행된 과학이라는 규준을 충족시키는 모든 투고논문을 출판하는데, 이것이 플로스 원 2010년에 세계 최대의 학술지로 만든 출판전략이다. 모든 주요 출판사들이 곧바로 플로스 원 거대 학술지”(megajournal) 모델을 모방하여 논문 수를 인위적으로 제한하지 않는 광범위한 학술지들을 출판했다.

대규모 독자층과 투고논문의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플로스 원은 같은 전공자의 엄격한 출판 전 리뷰의 타당성에서도 선구자가 되었다. 통계적 타당성, 윤리적 리뷰, 보고 지침과 관련한 몇 개의 검증사항은 모든 학술지 가운데 가장 엄격하다.

플로스는 처음에는 자선기금에 의하여 그리고 고든 앤 베티 무어 재단(the Gordon and Betty Moore Foundation), 빌 앤 멀린다 게이츠 재단(the Bill and Melinda Gates Foundation)두 재단은 각각 인텔사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창립자와 연결되어 있다과 같은 박애주의적 기금으로부터 온 수입에 의하여 재정을 조달했다. 플로스는 2010년에 처음으로 손익분기점에 도달했으며 비영리사업인데도 그때 이래 매년 흑자를 냈다. 플로스는 재정정보에 투명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왔으며 그리하여 비영리단체에 대해서 정부가 요구하는 정보공개에 준하는, 세부 수입액·지출액 공개의 선구자였다. 2012년에 플로스 출판벤처는 총 3 8백만 달러를 거둬들이고 거기서 7백만 달러의 흑자를 냈다.

정적 지속가능성이 일단 확립되자 학적 소통에서의 새로운 혁신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하나의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는 개별 논문들의 파급력과 쓰임새를 아주 세부적으로 측정하는 데 쓰이는 공개 데이터를 제공하는 도구인 논문수준표(Article Level Metrics)였다.3 이러한 혁신 이전에는 연구논문에 대한 평가가 전통적으로 그것 자체의 개별적 가치보다는 그것이 게재된 학술지의 평판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이 기획은 또 다른 영향을 미친 바 있으니, 10만 명 이상의 연구자와 400개 이상의 기관이 서명한, 연구평가에 관한 샌프란시스코 선언(the San Francisco Declaration on Research Assessment, DORA)이 바로 그것이다.4 2012년의 이 성명은 자금을 댄 사람, 기관, 기타 출판사들이 학술지의 피인용지수’(논문의 평균 인용 횟수)를 개별 과학자의 기여의 질과 혼동하지 않고 연구논문들을 그 자체의 장점을 기반으로 판단하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연구 평가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으며 고용·승진·해고를 결정하는 방식에 느리기는 해도 분명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더 최근에 플로스는 윤리적인 혹은 기타의 고려에 따라서 그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게재논문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연구 데이터에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플로스는 연구의 정확성을 지속적으로 평가하도록 장려하기 위해 논문들을 출판 이후 짜임새있게 평가하기 위한 새로운 도구들 또한 개발했다.

과학 분야의 출판을 커먼즈의 한 유형으로 다시 생각함으로써 플로스는 학적 출판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변화의 선봉에 있어왔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플로스가 이제 수천의 오픈 액세스 학술지들을 포함하고 50만 편 이상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연구논문들을 포함하는 과학 분야의 출판을 중차대하게 대변하고 선도적으로 혁신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Posted by 카오모
번역정원2017. 7. 25. 14:51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2017522일 게시글 “New Videos Explore the Political Potential of the Commons”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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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의 정치적 잠재력을 탐험하는 새로운 영상들

 

옮긴이: 카오모

 

세계 전역에서 온 최전방 활동가들이 생각하는 커먼즈에 관한 25분짜리 멋진 개관 영상 <정치공간에서의 커먼즈: 탈자본주의적 이행을 위하여>가 세계 전역의 커먼즈 운동의 최전방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의 12개 이상의 개별 인터뷰와 함께 막 배포됐다. 작년 8월 몬트리올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서 찍은 그 영상들은 그곳에서 이루어진 토론과 조직화의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다.

커먼즈 세계에 관한 이 멋진 영상을 함께 만든 몬트리올의 두 단체 리믹스 더 커먼스(Remix the Commons)와 커먼즈 스페이스(Commons Space) 그리고 알랭 앰브로시(Alain Ambrosi), 프레데릭 술탄(Frédéric Sultan), 스테파니 레사드-베루베(Stépanie Lessard-Berube)에게 크게 감사한다. 개관 영상은 커먼즈에 대한 소개가 아니라 오늘날 커먼즈 패러다임의 정치적전략적 전망에 관한 놀랍도록 통찰력 있는 일련의 진전된 해설이다.

개관 영상은 커머너와 전통적 운동과의 현재 출현하고 있는 정치적 동맹, 커먼즈가 국가권력과 상호작용하는 방법에 관한 아이디어, 커먼즈적 사고가 정책 토론과 대중문화에 진입하는 방식과 같은 최전방의 사태전개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그 영상에서 돋보이는 건 프레데릭 술탄, 갤레 크리코리안(Gaelle Krikorian), 알랭 앰브로시, 야닉 마르실(Ianik Marcil), 매튜 레암(Matthew Rheaume),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 샹탈 델마(Chantal Delmas), 빠블로 솔론(Pablo Solon), 크리스티안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 제이슨 나디(Jason Nardi) 등의 해설이다.

이들 각자와의 개별 인터뷰는 무척 흥미진진하다. (전체 리스트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인터뷰들 중 여섯 개는 영어, 아홉 개는 불어, 세 개는 스페인어로 이루어진다. 그것들의 길이는 10분에서 27분 사이이다.

인터뷰에 대한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여기 샘플을 제공한다.

이탈리아 법학자이자 커머너인 크리스티안 이아이오네는 이탈리아에서의 커먼즈 거버넌스를 위한 연구소(the Laboratory for the Governance of the Commons in Italy)를 이끈다. 5년 전에 수립된 프로젝트는 로마볼로냐밀라노메시나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에서의 커먼즈 거버넌스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더 최근에 그 프로젝트는 셰일라 포스터(Sheila Foster) 교수가 이끄는 포덤대(Fordham University)와 공동작업을 시작했고 암스테르담과 뉴욕에서 실험을 진행했다.

그의 인터뷰 <이탈리아에서의 도시 커먼즈 헌장>에서 이아이오네는 도시 커먼즈에 대한 관심과 부흥을 위한 볼로냐 헌장(the Bologna Charter for the Care and Regeneration of Urban commons)이 커먼즈를 창출하는 데서 그냥 복사해서 붙이는 식의 도구가 아니라고, 다양하고 지역적인 실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아이오네가 말하길 도시의 거버넌스 및 커먼즈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프로젝트 기획술이 발휘되어야 한다.” “헌장은 나폴리 등의 이탈리아 남부에서 단순히 복제될 수 없는데, 그것은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들이 이탈리아의 다른 부분들과 상이한 시민제도들과 공공윤리를 갖기 때문이다. ... 다른 도구들이 필요한데,” 이 도구들은 그 도시들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설계해야 한다.

그의 27분짜리 인터뷰 <이탈라이에서 커먼즈의 발생>에서 제이슨 나디는 커먼즈 패러다임이 탈성장, 협동, 연대경제, 생태학자, NGO, 진흥운동, 다양한 인권운동 같은 오늘날 출현하고 있는 대단히 상이한 운동들을 통일하고 통합하는 데 유용한 갱신된 패러다임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나디는 세계사회포럼이 거대 금융권력이 모든 것을 사유화하는 데 맞싸우기 위하여 다양한 분파들을 통일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는다.

데모크랫츠 닷 컴(Democrats.com)의 찰스 렌취너(Charles Lenchner)는 뉴욕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동체의 정원들을 도시 커먼즈로 변형하기 위한 뉴욕시에서의 중요한 운동을 인용하면서 <미국에서의 커먼>(11)에 대해 말한다. 또한 그는 오늘날 뉴욕시에서의 시민참여 예산 편성 운동의 증가를 거론했는데, 이 운동에서는 시의회의 대다수의 선거구가 그 절차를 사용한다. 뉴욕시는 협동조합에 더 많이 투자할 것을 장려하기도 하는데, 부분적으로 이는 불안정성과 소득불균형을 손보는 방법이다.

독일인 커먼즈 활동가인 질케 헬프리히는 <새로운 정치적 주제로서의 커먼즈>(27)를 논했다. 그녀는 오늘날 커먼즈에 관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는 불가능한데, 이는 너무도 많은 일들이 일어나거나 합류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을 뒤쫓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커먼즈에 접근하는 서로 다른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집단적으로 관리되는 공유 자원의 집합으로서의 커먼즈, 커머닝을 있게 하는 사회적 과정으로서의 커먼즈, 진행되고 있는 더 광범위한 패러다임 전환에 관한 사유태도나 사유방식으로서의 커먼즈가 그것이다.

케빈 플러네건(Kevin Flanagan)19분짜리 인터뷰 <P2P에 의한 이행>에서 커먼즈 세계 안에서, 특히 디지털 커먼즈, 피어생산(peer production), 협동경제 안에서 성장하고 있는 정치적 성숙에 대해 말한다. 그는 언제나 커먼즈의 정치가 있어왔다고, 그런데 그 정치는 문화정치에 그치지 않고 해커문화, 창작자 공간(maker space), 열린 디자인(open design), 하드웨어 운동(hardware movement)에 관여하는 더 큰 정치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커머너들은 협동조합과 사회연대경제 운동과 같은 더 전통적인 정치운동과 함께 하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이 잘 만들어진 일련의 영상들에는 사유를 위한 영양가 풍부한 양식들이 넘쳐난다

Posted by 카오모
번역정원2017. 5. 11. 23:00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가 evonomics.com2016518일에 게재한 글 “What Can Bind People Together”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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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커먼즈 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사람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옮긴이: 카오모

 

최소한의 사회적, 시민적 연대를 넘어 사람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인클로저의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는 인클로저가 커먼즈의 문화와 그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하는 오래된 방식, 이전에 사람들을 결속시켰던 사회적 관행, 사람들을 특정의 풍경에 뿌리내리게 했던 문화전통, 안정된 정체성을 제공했던 윤리규범, 이 모든 것이 전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시장문화를 위해서 일소되어 버린다. 집단적 관습이 개인주의로 대체된다. 고이 간직된 전통이 지금 통하는 것 혹은 오늘날 돈을 절약하는 그 무엇의 희생물이 된다. 다채로운 개성과 공동체의 특유한 전통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맑스는 딱딱한 모든 것이 녹아서 증발한다고 말하면서 자본주의의 상품화하는 논리를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인클로저는 커먼즈를 비가시적이게 만들면서 커먼즈의 역사와 기억을 가린다. 시장경제의 비인격적이며 개인주의적이고 상거래에 기초한 윤리가 새로운 표준이 된다.

커먼즈를 이해하는 데에는, 커먼즈의 풍부하지만 주목받지 못한 역사를 좀더 배우는 것이 유용하다. 자본주의 문화는 모든 역사가, 완벽으로 나아가진 않더라도 가차 없이 더 큰 진보로 나아간다고 믿고 싶어한다. 사회가 현재 순간이라는 정상을 향해 오르듯 모든 가능한 세계 중 최고의 세계로 나아간다고 말이다. 커먼즈의 복합적이지만 간과된 역사는 다른 스토리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어떻게 협동을 위한 새롭고 독창적인 방식을 배워왔는지에 관한 설명이다. 그것은 권력체제(봉건주의, 권위주의, 자본주의)와는 별도로 권력체제와는 매우 다른 중요성을 갖는 공유된 목적을 위하여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제도를 만드는 이야기다.

커먼즈는 다른 권력체제제도관계 안에 둥지를 틀곤 하며, 그리하여 커먼즈가 완전히 독립적인 건 아니다. 커먼즈의 논리와 (봉건영주든, 기술시장이든, 국법이든) 커먼즈가 둥지를 트는 환경의 질서 사이에는 종종 심오한 창조적 긴장이 있다. 이것이 상당수의 커먼즈가 권력의 틈새에서, 권력이 용인하거나 간과하는 혹은 우연히 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안정된 영역에서 번성하는 이유다.

냉엄한 현실은 커먼즈가 지배적인 제도형태가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커먼즈의 이러한 종속적 역할을 봉건제 하에서 번성한 중세 공유지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하의 상호조합에서, 우리 시대에는 자본주의 하의 학계와 시민연합체와 같은 선물경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커먼즈는 더 큰 권력체제 안에 둥지를 틀었었고 여전히 틀고 있으며 주권적 힘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호혜와 협동은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문명이 시작하면서 다수의 그리고 미래 세대의 공유된 이익을 지키려했던 법전통이 창안됐다. 협동하려는 인간의 충동은 순전히 이타적 형태로는 드물게 드러난다. 그것은 개인주의 및 권력과의 창조적 긴장 속에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우리가 개인주의집단주의가 상호 반대된다고 곧잘 대조하더라도, 커먼즈에서는 그것들이 경계가 흐려지며 복잡한 방식으로 뒤섞이는 경향이 있다. 그 두 가지는 상호 배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동적인 음양적 보완물이다.

전통적인 소규모 커먼즈는 인간이란 본래 무제한적 욕망의 물질만능주의적 개인들이며 이러한 성향은 보편적이라는 현대 경제학자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보여준다. 정말로 그렇다. 인간사에서의 진정한 탈선은 경제인(Homo economicus), 전지구적으로 통합된 시장사회라는 생각이다. 역사상 그 어느 시대도 시장이 인간 사회의 그토록 많은 낱낱의 주요한 요소들을 조직한 적이 없었다. 그토록 많은 사회들이 시장경쟁과 자본축적의 원리를 그 중심에 두고서 조직된 적은 역사적으로 결코 없었다. 이러한 원리가 극단적인 이기적 개인주의, 부의 불평등, 자연생태계를 불구로 만드는 공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도 염려스러운 것이지만 대규모 시장에 기반한 시스템이 불안정하고 유약하기 때문에 염려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2008년의 금융위기가 있은 지 6년이 지났어도 거대 권력들은 여전히 다수의 국내외 시장에 신탁, 신용, 사회 안정을 재수립코자 지랄하고 있다. 위기를 통해서든 선택을 통해서든 인류(혹은 적어도 산업화된 서구)가 인간 협동의 제도를 재발견하거나 재발명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사실상 불가피한 것이다.

 

진화과학이 협동에 관해서 말해주는 것

사리사욕에 관한 그들의 전제를 생각해보면, 경제학자들이 세계를 위험하고 경쟁적인 장소로 보는 건 놀랍지 않다. 국가가 말썽꾼을 제지하거나 처벌을 가하려고 개입하지 않는다면 무정부상태로 붕괴되어버릴 그런 장소로 말이다. 로크홉스 같은 만만찮은 일단의 정치철학자들이 18세기에 이러한 세계관을 제시했다. 홉스는 생은 고독하고 가난하며 추잡하고 잔인하며 짧다고 말했다. 보편적 이기심과 개인적 합리성이라는 생의 원리에 근거하여 법과 공공정책의 전체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대체로 그저 그런이야기, 즉 실제로는 인간 본성의 완전한 경험적 실재를 말하지 않는 부분적으로만 맞는 이야기라면 어쩌겠는가? 인간의 협동호혜비합리적 행동이 경쟁적 합리성효용의 최대화만큼이나 중요하다면 어쩔텐가?

이는 진화과학에서, 특히 뇌신경학유전학발달심리학진화심리학생물학조직사회학비교인류학에서 이루어진 오늘날의 수많은 연구의 깜짝 놀랄만한 결론이다.

이러한 과학들은 사회적 호혜와 신뢰가 우리 인류에 깊게 뿌리박힌 원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원리는 심지어 생물학적으로 코드화된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탐구한 최초의 과학자들 중 한 명이 1902년에 상호부조: 진화의 한 요소를 쓴 러시아 동물학자 크로포트킨이었다. 크로포트킨은 동물계를 탐구하고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진화적으로 강조해야 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종의 성공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다윈적 의미에서의 경쟁이 아닌 협동이라는 점이다.” 동물들은 서로 군집을 이루어 살며 그들 집단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서로를 돕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의 주류 과학은 매우 다른 경로를 밟았다. 주류 과학은 유기체가 행동하고 진화하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대개 합리적 사욕이라는 모델을 받아들여왔다. 진화과학에서 자연선택은 전통적으로 집단들이 아니라 개체들에게 일어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왔는데, 이는 개체들이 자연의 생물학적 위계에서 특권을 가지는 단위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화적 적응이 무리들이나 전체 종들에서가 아니라 개체들에서 일어난다고 생각되어왔다. 과학자들은 집단에게 좋은생물학적 성질이 집단의 수준에서는 전해지거나 진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대체로 거부해왔다.

하지만 지난 10년 사이 집단 수준의 선택이 인간의 진화와 동물의 진화에서 중요한 동력임을 주장하는 마틴 노왁(Martin Nowak), E.O. 윌슨(E.O. Wilson), 데이빗 슬런 윌슨(David Sloan Wilson)과 같은 저명한 과학자들의 새로운 연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실험증거는 진화적 적응이 집단을 포함한 생물학적 위계의 모든 수준에서 일어날 수 있으며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본적 아이디어는 협동과 이타적 행위가 개체에게는 국소적으로 이익이 없을수도 있지만 집단에게는 고도로 적응적인 성향일 수 있다는 것이다. E.O. 윌슨과 데이빗 슬런 윌슨이 말하듯이 이기심은 집단 안에서는 이타심을 이기지만 이타적 집단이 이기적 집단을 이긴다. 그밖의 모든 것은 이런 저런 주석일 뿐이다.” 요컨대 호혜적인 사회적 교환이 인간적 정체성공동체문화의 핵심에 자리한다. 그것은 인간 종을 살아남도록 그리고 진화하도록 하는 필수적 뇌기능이다.

물론 격한 논쟁이 여전히 진행중이다. 하지만 인간이 신경학적으로 공감하고 협력하게끔 되어있다는 점이, 인간이 그들의 동료 인간과 감정적으로 연결되도록 되어있다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작가이자 평론가인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그녀의 책 지옥에 세워진 낙원: 재앙에서 탄생한 이례적 공동체들(A Paradise Built in Hell: Extraordinary Communities That Arise in Disaster)에서 보여주었듯이, 1907년의 샌프란시스코 지진, 2차 세계대전 동안의 독일의 런던공습, 9/11 테러리스트의 공격과 같은 재앙들로 인해 고통받은 공동체 구성원들은 믿어지지 않는 자기희생기쁨결단서로를 향한 가슴 아린 사랑을 보여준다. 그러한 재앙들이 창조한 공동체들은 진정 지옥에 세워진 낙원이다. 그녀의 책은 세계가 권위주위와 공포를 통해 통치되어야 하는 고립되고 이기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져있다고 보는 경제학자들과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답변이다.

하버드대학의 이론생물학자 마틴 노왁은 진화의 가장 주목할 만한 측면은 아마도 경쟁적 세계에서 협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이와 자연선택 옆에 진화의 3번째 근본 원리로서 자연협동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후반기에 개체선택론의 인기가 시장문화의 전성기 및 그것의 경쟁적 개인주의 윤리와 묘하게 함께 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화가 과학적 관찰에 영향을 미친 사례가 아닐까?

진화과학에서 이루어진 더 최근의 발견들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개별 유기체가 상호적으로 의존하는 복잡계 안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이는 개체의 사욕과 그룹의 생존이 수렴하는 경향이 있음을 의미한다. “사욕이타심이라는 추정상의 이원론을 다소 인위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말이다.

유용한 온라인 커뮤니티들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감정을 알아볼 것이다. 때때로 서로의 견해가 틀리거나 외적인 요인에 의해 방해를 받더라도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이 다소 조정되거나 강화된다.

사회과학자인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교수는 공동체가 커먼즈에 기반한 그들 자신의 거버넌스 시스템을 스스로 조직할 수 있었고 협동의 윤리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세계 전역의 수백 개 사례들을 연구했다. 그녀의 연구는 민족지학적 실재를 발굴해냈다. 커먼즈가 개인들의 협소한 사욕을 제한하고 더 큰 집단적 어젠다를 지지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기쁜 소식은 진화과학자들이 유전학생물학신경학진화심리학의 더 기초적인 수준에서 이 주장들을 확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커먼즈의 잊혀진 법적 역사

커먼즈의 존재가 진화과학에서 은폐되어 있었다면 이것은 이제야 알려지고 있다마찬가지로 커먼즈와 관련된 법의 역사도 은폐되어 있었다. 커먼즈법 또한 대체로 무시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 법은 고대 이집트와 로마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유럽중세사 전체에 걸쳐 금실처럼 수놓아져 있다. 재산에 관한 로마의 법적 범주와 마그나카르타 그리고 그에 수반하는 삼림헌장 같은 커먼즈에 기초한 법의 랜드마크들이 서양법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다.

존 왕을 생각해보자. 13세기 영국에서는 일련의 군주들이 삼림지의 점점 더 큰 부분을 그들의 개인적 유흥과 사용을 위해 요구하기 시작했다. 봉신들과 커머너들의 희생이 뒤따랐던 요구였다. 음식장작건축자재를 얻기 위해 숲에 의존했던 커머너들의 기초생계수단을 위협하면서 커먼즈를 잠식했던 이들 왕족은 오래 지속됐고 격렬했던 시민적 투쟁을 야기했다. 가축은 숲을 돌아다닐 수 없었고 돼지는 도토리를 먹을 수 없었으며 커머너는 그들의 집을 고치기 위한 목재를 모을 수 없었다. 선박은 댐이나 사적인 둑길이 지어진 강을 지나다닐 수 없었다.

수년간의 야만적 무장대립 이후에 존 왕은 1215년에 그의 절대권력에 대한 일련의 법적 제한에 공식적으로 동의했고 커머너들을 포함한 다른 사회구성원들에게 여타의 권리들 중 적합한 법절차인권생존권을 부여하는 데 합의했다. 이것이 서구문명의 초석 중 하나인, 위대한 마그나카르타였다. 인신보호권배심원에 의한 심판고문 금지법치가 모두 마그나카르타에서 연원한다. 그때 이래로 이 모든 법적 원리들은 세계 전역의 근대 헌법에서 시민의 기본권으로 발견된다. 그것들은 몇몇 선도적인 인권협약에서도 천명된다.

거의 잊혀진 증서인 삼림헌장 또한 여기서 언급할 가치가 있다. 마그나카르타 2년 후에 조인되고 이후 마그나카르타에 통합된 이 헌장은 왕의 땅과 숲을 사용하는 커머너들의 전통적 권리를 인정했다. 그래서 커머너들은 공식적으로 왕의 소유지에서 돼지방목권(그들의 돼지들을 위한 방목장), 장작채취권(땔감 모으기), 가축사육권(풀 먹이기), 토탄채굴권(연료용 토탄 캐기)을 누렸다. 현실적 문제 때문에 삼림헌장은 커머너들에게 기본생존권을 부여했다. 또한 그것은 왕의 인클로저를 방어하면서 왕의 주장관들이 행하는 국가테러에 맞서 커머너들을 보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간략한 역사가 말해주듯이 커먼즈법은 법의 상이한 유형을 가리킨다. 즉 이 법은 커머너들의 체험에서 유래하며, 글로 쓰여져서 고정된 것이라기보다는 비공식적이고 상황을 따르며 진화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리고 상업적 목표나 국가적 권위가 아니라 사회적 공생과 평등을 촉진한다. 피터 라인보우는 이를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커머닝은 노동과정에 뿌리박혀 있다. 그것은 들판고지해안에서의 특수한 관습에 포함되어 있다. 공통적 권리들은 노동에 의해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것들은 경험에 속하지 학교교육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커머닝은 법과 국가의 시간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이다. 커머닝은 훨씬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커머닝이 죽었다거나 전근대적이라거나 회고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커머닝은 공식법의 남용을 막는 보루로서 너무도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는데, 이는 커머닝이 공식법이 국민에게 책임을 지도록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식 중 하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공식법은 악인들이 그것을 왜곡할 수 있는 식별가능한 접근점 입법부법원국가수반을 가지기 때문에 더 쉽게 타락할 수 있으며 기만될 수 있지만, 토착법은 민중의 일상과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그리하여 조작하거나 부패시키기 어렵다.

커머너들에게 환영을 받은 마그나카르타였음에도 그에 대한 확약은 끊임없이 경계를 기울일 때에만 보장받을 수 있었다. 커머너들은 의심을 가졌고 반격의 필요성을 이해했다. 이것이 왕들이 몇 년에 걸쳐 마그나카르타를 반복해서 다시 공포하면서 커머너들의 기본권이 실제로 인정되고 있음을 의식(儀式)으로 확언한 하나의 이유이다. 물론 한 장의 종이는 국가권력의 남용을 막는 데 그저 제한적 가치만을 가지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시대에 확인할 수 있었듯이 테러리즘과 싸운다는 미명 하에 미 정부는 인신보호권과 적합한 절차, 고문의 금지 및 마그나카르타의 기타 원리들을 무시해왔고 벌을 받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마그나카르타 역시 토지에 대한 거대하고 새로운 인클로저들을 거의 막지 못했다. 1536년에 헨리 3세는 영주와 귀족에 의한 일련의 광포한 인클로저들을 촉발하면서 가톨릭 수도원을 없애버렸는데, 이는 라인보우가 말하듯이 국가가 후원한 대규모 사유화 작업이었다. 수년간에 걸쳐 4000개의 법령들로 승인받은 떠오르는 젠트리계급이 영국의 전 공유지의 대략 15%를 그들 자신의 사적 사용을 위해 차지했다. 이러한 인클로저들은 수많은 커머너들이 흙과 맺었던 사회적 관계를 파괴했고 그들의 사회적 정체성과 전통을 짓밟았다. 커머너들을 프롤레타리아화하는 길을 닦으면서 말이다.

인클로저가 강화되자 커머닝하는 그들의 옛 방식을 고수하려했던 여성들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는 생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커머닝할 권리를 주장했다은 종종 자신들이 마녀로 비난받는다는 걸 알게 됐다.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는 중세의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그녀의 페미니즘 역사서 캘리번과 마녀에서 이 주제들을 탐구했다. 그녀가 쓰기를 커먼즈의 사회적 기능은 여성에게 특히 중요했는데, 이들은 토지에 대한 소유와 사회적 권력을 덜 가지기에 그들의 생존자율사회성을 위해 커먼즈에 더 많이 의존했던 사람들이었다.”

 

커먼즈법의 쇠퇴

커먼즈 연구가인 르워스 하이드(Lewis Hyde)인클로저의 의미는 지역의 기억 속에 보존되어 있던 관습이 이끌던 삶이 글로 보존되어 있는 국법이 인도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라고 봤다. “그것의 의미는 변화가 한때는 쇠퇴와 연관되어 의심스럽지만 이제는 성장과 연결되어 칭송받게 되었다는, 즉 변화 자체의 가치가 전도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의 의미는 (공장이 시간을 합리화하고 측정하며 그에 기초하여 사람들의 행동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시간의 척도와 시간에 대한 인식에서의 변화였다.”

토지에 대한 민중의 접근권이 사회적 관습과 분리되자 새로운 유형의 인간 즉 분명 집단의 일원이 아니며 그의 세계관이 개별임금기술진보사회진보물질적 이득에로 향하게 된 개인이 나타났다. 칼 폴라니는 새로운 시장질서가 이주하며 방랑하는, 자존감과 기율을 결여하여 거칠고 냉담한 존재인 그런 사람들을 만들었다고 썼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시장질서의 필요에 부응코자 커먼즈를 구성했던 요소들자원들커머너들사회적 관행들을 해체하고 상품화한 것의 귀결이었다.

물론 인클로저에는 영주/커머너 관계를 폐기하고 가신을 자유보유권자로 바꾼 것과 같은 몇몇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자유는 두 가지 상반된 결과를 낳았다. 인클로저가 새로운 정체성과 사회적 자유를 추구하도록 인민을 해방하면서 커먼즈의 사회적 응집도 파괴했던 것이다. 즉 인민의 확실한 생존보장생태적 지속가능성정체성자원사용을 안정적으로 연결시키는 관계를 말이다.

사회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역사는 커먼즈를 해체함으로써 생겨난 몇몇 최악의 구조적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19-20세기의 유럽사회주의는 산업사회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예전 커머너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상호부조와 관료제를 도입했다. 소비자협동사회보장제도지방의 상수도와 같은 상향식 개혁이 창안됐다. 이는 국가/시장이라는 대단히 상이한 역사적 맥락에서 커머너들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개혁들은 분명 자유방임적 질서에 비해 개선된 것이었다. 실제로 다수의 초기 사회주의적유토피아적 기획들이 다소간 커먼즈로 작용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 기획들이 여전히 전통적 커먼즈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간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단체가 국법과 관료제, 기업과 시장의 힘이 요구하는 것에 순응하자 커머닝의 실천 과 커먼즈의 생명력이 시나브로 사라졌다.

국가규제는 자유시장이 낳은 문제들 즉 환경공동체인체에 비용과 위험을 전가하는 걸 보상하기 위한 또 다른 수단이어왔다. 환경 관련 관행을 규제하고 음식의료장비화학물질자동차소비재의 안전을 요구하는 것은 커머너들의 사회윤리규범을 강화하기 위해 공식법과학관료제라는 까다로운 장치를 사용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상업거래의 규모와 다국적 기업의 힘을 생각해보면, 국가규제가 분명 필요하다. 전통적 커먼즈는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결과들을 보증하기에는 너무도 작으며 조직되지 않았고 자원이 부족하다.

다른 한편에서 규제가 그다지 잘 이루어져온 건 아니다. 법의 집중화형식화는 규제되는 산업으로 하여금 규제과정을 더 쉽게 장악하고 부패시키는 걸 가능케 했다. 국가/시장의 힘과 양자가 깊이 연루되어 있는 공동의 이익을 생각하면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거버넌스가 시장이 낳는 만성적인 사회적, 환경적 남용에 재갈을 물릴 수 있도록 어떻게 재구조화될 수 있는지는 일종의 열린 물음으로 남아 있다.

국가규제의 결과가 결코 한결같지 않듯이 공통자산의 수탁자로서의 국가의 역할도 한결같지 않다. 때로 국가의 역할은 참담하기도 하다. 우리는 국가가 관리하는 많은 자원이 인민에 속한다는 사실을 쉽사리 잊는다.

국가는 공기공유지해안지역야생생물을 소유하지않으며 그것들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인민의 관리대행이자 수탁자로 행동하는 것만이 국가에 부여된 권한이다. 공적 신탁론 하에서 국가는 이러한 자원들을 파괴하게 해선 안 된다. 국가의 책무를 강조하고자 나는 국가가 매개하는, 대규모 커먼즈를 국가수탁커먼즈로 부르고 싶다.

불행하게도 종종 국가는 경제성장을 억제하고 널리 믿어지는 자유시장원리라는 허구를 위반할까 두려워 시장에 개입해야하는 의무를 소홀히 한다. 예컨대 안전규제와 공익사업에 대한 요구는 사회를 안정화하고 심각한 위해를 막으며 초보적인 사회적 공정성을 보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시대에는 대다수의 정부가 이러한 목표들조차 자본과 기업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짐이자 경제성장의 덫으로 여긴다.

물론 많은 풀뿌리 운동들이 다소 독립적인 협동조합과 상호조합을 발전시켜왔다. 불행하게도 대안을 제시하는 이러한 시스템들은 의미 있는 규모에 도달하는 데 대체로 실패해왔다. 이와 유사하게 많은 중요한 규제를 통한 보호가 수년 간 이루어졌음에도, 그것이 시장이 낳는 새로운 문제들의 가차 없는 흐름에 필적할 만큼 성공해온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규제가 대체로 법절차주의와 과학지식에 지배적인 영향을 받은 결과 지역주민들이나 개별소비자들의 시각이 의사결정에서 변호사들자격증이 있는 기술전문가들기업임원들의 시각만큼 중시되지 않는다. 커머너들이 거버넌스 과정에 참여하고자 할 때 그들은 종종 탈법적인 사람이 되거나 혹은 그저 참여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실제로 표면상으로는 공정하고 평등하며 보편적인 참여를 보장하고자 했던 바로 그 제도화과정이 커머너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경향 또한 가진다. 사회민주주의국가가 사회안정이라는 기획을 관리해왔을 때, 그리고 국가공산주의가 조합적인 집단자주성을 무시해왔을 때가 그러했다. 커머너들이 국민국가의 법체계를 통해서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자원을 적절히 보호하는 데 성공하는 일이 대단히 이례적이고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한 대단히 명민한 논평자들 중의 일부는 다음과 같은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이다. 더 커머너(The Commoner) 웹사이트의 편집자인 마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 미드나잇 노츠 컬렉티브(Midnight Notes Collective)를 창립한 조지 카펜치스(George Caffentzis), 커먼즈의 페미니즘적 함의에 주목하는 역사가인 실비아 페데리치, 마그나카르타 선언(The Magna Carta Manifesto) 또 다른 영국 커먼즈의 역사를 저술한 피터 라인보우, 정치 이론가이자 다중(Multitude)제국(Empire)공통체(Commonwealth)의 저자인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 이들 각각이 상이한 방식으로 주목해온 것은 고삐 풀린 자본주의시장의 핵심적 문제가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사회적 연계(협동관습전통)를 파괴하고 사회와 개별 커먼즈의 유기적 결합을 손상시키는 경향이라는 점이었다. 자본은 커먼즈를 노동토지자본화폐라는 그것의 구성요소들로 분해하며 이 요소들을 그 가치가 그것들의 가격과 똑같은 상품들로 다룬다.

이것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도덕적정치적 위기를 야기해왔는데, 그것은 시장자본주의가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장교환에 참여하는 데 필수적인 최소한의 사회적 시민적 연대를 넘어 사람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시장 기반 사회가 커먼즈 없이 생존할 수 있을까

Posted by 카오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