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정원2017. 5. 11. 23:00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가 evonomics.com2016518일에 게재한 글 “What Can Bind People Together”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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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커먼즈 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사람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옮긴이: 카오모

 

최소한의 사회적, 시민적 연대를 넘어 사람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인클로저의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는 인클로저가 커먼즈의 문화와 그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하는 오래된 방식, 이전에 사람들을 결속시켰던 사회적 관행, 사람들을 특정의 풍경에 뿌리내리게 했던 문화전통, 안정된 정체성을 제공했던 윤리규범, 이 모든 것이 전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시장문화를 위해서 일소되어 버린다. 집단적 관습이 개인주의로 대체된다. 고이 간직된 전통이 지금 통하는 것 혹은 오늘날 돈을 절약하는 그 무엇의 희생물이 된다. 다채로운 개성과 공동체의 특유한 전통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맑스는 딱딱한 모든 것이 녹아서 증발한다고 말하면서 자본주의의 상품화하는 논리를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인클로저는 커먼즈를 비가시적이게 만들면서 커먼즈의 역사와 기억을 가린다. 시장경제의 비인격적이며 개인주의적이고 상거래에 기초한 윤리가 새로운 표준이 된다.

커먼즈를 이해하는 데에는, 커먼즈의 풍부하지만 주목받지 못한 역사를 좀더 배우는 것이 유용하다. 자본주의 문화는 모든 역사가, 완벽으로 나아가진 않더라도 가차 없이 더 큰 진보로 나아간다고 믿고 싶어한다. 사회가 현재 순간이라는 정상을 향해 오르듯 모든 가능한 세계 중 최고의 세계로 나아간다고 말이다. 커먼즈의 복합적이지만 간과된 역사는 다른 스토리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어떻게 협동을 위한 새롭고 독창적인 방식을 배워왔는지에 관한 설명이다. 그것은 권력체제(봉건주의, 권위주의, 자본주의)와는 별도로 권력체제와는 매우 다른 중요성을 갖는 공유된 목적을 위하여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제도를 만드는 이야기다.

커먼즈는 다른 권력체제제도관계 안에 둥지를 틀곤 하며, 그리하여 커먼즈가 완전히 독립적인 건 아니다. 커먼즈의 논리와 (봉건영주든, 기술시장이든, 국법이든) 커먼즈가 둥지를 트는 환경의 질서 사이에는 종종 심오한 창조적 긴장이 있다. 이것이 상당수의 커먼즈가 권력의 틈새에서, 권력이 용인하거나 간과하는 혹은 우연히 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안정된 영역에서 번성하는 이유다.

냉엄한 현실은 커먼즈가 지배적인 제도형태가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커먼즈의 이러한 종속적 역할을 봉건제 하에서 번성한 중세 공유지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하의 상호조합에서, 우리 시대에는 자본주의 하의 학계와 시민연합체와 같은 선물경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커먼즈는 더 큰 권력체제 안에 둥지를 틀었었고 여전히 틀고 있으며 주권적 힘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호혜와 협동은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문명이 시작하면서 다수의 그리고 미래 세대의 공유된 이익을 지키려했던 법전통이 창안됐다. 협동하려는 인간의 충동은 순전히 이타적 형태로는 드물게 드러난다. 그것은 개인주의 및 권력과의 창조적 긴장 속에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우리가 개인주의집단주의가 상호 반대된다고 곧잘 대조하더라도, 커먼즈에서는 그것들이 경계가 흐려지며 복잡한 방식으로 뒤섞이는 경향이 있다. 그 두 가지는 상호 배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동적인 음양적 보완물이다.

전통적인 소규모 커먼즈는 인간이란 본래 무제한적 욕망의 물질만능주의적 개인들이며 이러한 성향은 보편적이라는 현대 경제학자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보여준다. 정말로 그렇다. 인간사에서의 진정한 탈선은 경제인(Homo economicus), 전지구적으로 통합된 시장사회라는 생각이다. 역사상 그 어느 시대도 시장이 인간 사회의 그토록 많은 낱낱의 주요한 요소들을 조직한 적이 없었다. 그토록 많은 사회들이 시장경쟁과 자본축적의 원리를 그 중심에 두고서 조직된 적은 역사적으로 결코 없었다. 이러한 원리가 극단적인 이기적 개인주의, 부의 불평등, 자연생태계를 불구로 만드는 공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도 염려스러운 것이지만 대규모 시장에 기반한 시스템이 불안정하고 유약하기 때문에 염려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2008년의 금융위기가 있은 지 6년이 지났어도 거대 권력들은 여전히 다수의 국내외 시장에 신탁, 신용, 사회 안정을 재수립코자 지랄하고 있다. 위기를 통해서든 선택을 통해서든 인류(혹은 적어도 산업화된 서구)가 인간 협동의 제도를 재발견하거나 재발명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사실상 불가피한 것이다.

 

진화과학이 협동에 관해서 말해주는 것

사리사욕에 관한 그들의 전제를 생각해보면, 경제학자들이 세계를 위험하고 경쟁적인 장소로 보는 건 놀랍지 않다. 국가가 말썽꾼을 제지하거나 처벌을 가하려고 개입하지 않는다면 무정부상태로 붕괴되어버릴 그런 장소로 말이다. 로크홉스 같은 만만찮은 일단의 정치철학자들이 18세기에 이러한 세계관을 제시했다. 홉스는 생은 고독하고 가난하며 추잡하고 잔인하며 짧다고 말했다. 보편적 이기심과 개인적 합리성이라는 생의 원리에 근거하여 법과 공공정책의 전체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대체로 그저 그런이야기, 즉 실제로는 인간 본성의 완전한 경험적 실재를 말하지 않는 부분적으로만 맞는 이야기라면 어쩌겠는가? 인간의 협동호혜비합리적 행동이 경쟁적 합리성효용의 최대화만큼이나 중요하다면 어쩔텐가?

이는 진화과학에서, 특히 뇌신경학유전학발달심리학진화심리학생물학조직사회학비교인류학에서 이루어진 오늘날의 수많은 연구의 깜짝 놀랄만한 결론이다.

이러한 과학들은 사회적 호혜와 신뢰가 우리 인류에 깊게 뿌리박힌 원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원리는 심지어 생물학적으로 코드화된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탐구한 최초의 과학자들 중 한 명이 1902년에 상호부조: 진화의 한 요소를 쓴 러시아 동물학자 크로포트킨이었다. 크로포트킨은 동물계를 탐구하고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진화적으로 강조해야 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종의 성공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다윈적 의미에서의 경쟁이 아닌 협동이라는 점이다.” 동물들은 서로 군집을 이루어 살며 그들 집단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서로를 돕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의 주류 과학은 매우 다른 경로를 밟았다. 주류 과학은 유기체가 행동하고 진화하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대개 합리적 사욕이라는 모델을 받아들여왔다. 진화과학에서 자연선택은 전통적으로 집단들이 아니라 개체들에게 일어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왔는데, 이는 개체들이 자연의 생물학적 위계에서 특권을 가지는 단위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화적 적응이 무리들이나 전체 종들에서가 아니라 개체들에서 일어난다고 생각되어왔다. 과학자들은 집단에게 좋은생물학적 성질이 집단의 수준에서는 전해지거나 진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대체로 거부해왔다.

하지만 지난 10년 사이 집단 수준의 선택이 인간의 진화와 동물의 진화에서 중요한 동력임을 주장하는 마틴 노왁(Martin Nowak), E.O. 윌슨(E.O. Wilson), 데이빗 슬런 윌슨(David Sloan Wilson)과 같은 저명한 과학자들의 새로운 연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실험증거는 진화적 적응이 집단을 포함한 생물학적 위계의 모든 수준에서 일어날 수 있으며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본적 아이디어는 협동과 이타적 행위가 개체에게는 국소적으로 이익이 없을수도 있지만 집단에게는 고도로 적응적인 성향일 수 있다는 것이다. E.O. 윌슨과 데이빗 슬런 윌슨이 말하듯이 이기심은 집단 안에서는 이타심을 이기지만 이타적 집단이 이기적 집단을 이긴다. 그밖의 모든 것은 이런 저런 주석일 뿐이다.” 요컨대 호혜적인 사회적 교환이 인간적 정체성공동체문화의 핵심에 자리한다. 그것은 인간 종을 살아남도록 그리고 진화하도록 하는 필수적 뇌기능이다.

물론 격한 논쟁이 여전히 진행중이다. 하지만 인간이 신경학적으로 공감하고 협력하게끔 되어있다는 점이, 인간이 그들의 동료 인간과 감정적으로 연결되도록 되어있다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작가이자 평론가인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그녀의 책 지옥에 세워진 낙원: 재앙에서 탄생한 이례적 공동체들(A Paradise Built in Hell: Extraordinary Communities That Arise in Disaster)에서 보여주었듯이, 1907년의 샌프란시스코 지진, 2차 세계대전 동안의 독일의 런던공습, 9/11 테러리스트의 공격과 같은 재앙들로 인해 고통받은 공동체 구성원들은 믿어지지 않는 자기희생기쁨결단서로를 향한 가슴 아린 사랑을 보여준다. 그러한 재앙들이 창조한 공동체들은 진정 지옥에 세워진 낙원이다. 그녀의 책은 세계가 권위주위와 공포를 통해 통치되어야 하는 고립되고 이기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져있다고 보는 경제학자들과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답변이다.

하버드대학의 이론생물학자 마틴 노왁은 진화의 가장 주목할 만한 측면은 아마도 경쟁적 세계에서 협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이와 자연선택 옆에 진화의 3번째 근본 원리로서 자연협동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후반기에 개체선택론의 인기가 시장문화의 전성기 및 그것의 경쟁적 개인주의 윤리와 묘하게 함께 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화가 과학적 관찰에 영향을 미친 사례가 아닐까?

진화과학에서 이루어진 더 최근의 발견들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개별 유기체가 상호적으로 의존하는 복잡계 안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이는 개체의 사욕과 그룹의 생존이 수렴하는 경향이 있음을 의미한다. “사욕이타심이라는 추정상의 이원론을 다소 인위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말이다.

유용한 온라인 커뮤니티들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감정을 알아볼 것이다. 때때로 서로의 견해가 틀리거나 외적인 요인에 의해 방해를 받더라도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이 다소 조정되거나 강화된다.

사회과학자인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교수는 공동체가 커먼즈에 기반한 그들 자신의 거버넌스 시스템을 스스로 조직할 수 있었고 협동의 윤리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세계 전역의 수백 개 사례들을 연구했다. 그녀의 연구는 민족지학적 실재를 발굴해냈다. 커먼즈가 개인들의 협소한 사욕을 제한하고 더 큰 집단적 어젠다를 지지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기쁜 소식은 진화과학자들이 유전학생물학신경학진화심리학의 더 기초적인 수준에서 이 주장들을 확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커먼즈의 잊혀진 법적 역사

커먼즈의 존재가 진화과학에서 은폐되어 있었다면 이것은 이제야 알려지고 있다마찬가지로 커먼즈와 관련된 법의 역사도 은폐되어 있었다. 커먼즈법 또한 대체로 무시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 법은 고대 이집트와 로마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유럽중세사 전체에 걸쳐 금실처럼 수놓아져 있다. 재산에 관한 로마의 법적 범주와 마그나카르타 그리고 그에 수반하는 삼림헌장 같은 커먼즈에 기초한 법의 랜드마크들이 서양법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다.

존 왕을 생각해보자. 13세기 영국에서는 일련의 군주들이 삼림지의 점점 더 큰 부분을 그들의 개인적 유흥과 사용을 위해 요구하기 시작했다. 봉신들과 커머너들의 희생이 뒤따랐던 요구였다. 음식장작건축자재를 얻기 위해 숲에 의존했던 커머너들의 기초생계수단을 위협하면서 커먼즈를 잠식했던 이들 왕족은 오래 지속됐고 격렬했던 시민적 투쟁을 야기했다. 가축은 숲을 돌아다닐 수 없었고 돼지는 도토리를 먹을 수 없었으며 커머너는 그들의 집을 고치기 위한 목재를 모을 수 없었다. 선박은 댐이나 사적인 둑길이 지어진 강을 지나다닐 수 없었다.

수년간의 야만적 무장대립 이후에 존 왕은 1215년에 그의 절대권력에 대한 일련의 법적 제한에 공식적으로 동의했고 커머너들을 포함한 다른 사회구성원들에게 여타의 권리들 중 적합한 법절차인권생존권을 부여하는 데 합의했다. 이것이 서구문명의 초석 중 하나인, 위대한 마그나카르타였다. 인신보호권배심원에 의한 심판고문 금지법치가 모두 마그나카르타에서 연원한다. 그때 이래로 이 모든 법적 원리들은 세계 전역의 근대 헌법에서 시민의 기본권으로 발견된다. 그것들은 몇몇 선도적인 인권협약에서도 천명된다.

거의 잊혀진 증서인 삼림헌장 또한 여기서 언급할 가치가 있다. 마그나카르타 2년 후에 조인되고 이후 마그나카르타에 통합된 이 헌장은 왕의 땅과 숲을 사용하는 커머너들의 전통적 권리를 인정했다. 그래서 커머너들은 공식적으로 왕의 소유지에서 돼지방목권(그들의 돼지들을 위한 방목장), 장작채취권(땔감 모으기), 가축사육권(풀 먹이기), 토탄채굴권(연료용 토탄 캐기)을 누렸다. 현실적 문제 때문에 삼림헌장은 커머너들에게 기본생존권을 부여했다. 또한 그것은 왕의 인클로저를 방어하면서 왕의 주장관들이 행하는 국가테러에 맞서 커머너들을 보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간략한 역사가 말해주듯이 커먼즈법은 법의 상이한 유형을 가리킨다. 즉 이 법은 커머너들의 체험에서 유래하며, 글로 쓰여져서 고정된 것이라기보다는 비공식적이고 상황을 따르며 진화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리고 상업적 목표나 국가적 권위가 아니라 사회적 공생과 평등을 촉진한다. 피터 라인보우는 이를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커머닝은 노동과정에 뿌리박혀 있다. 그것은 들판고지해안에서의 특수한 관습에 포함되어 있다. 공통적 권리들은 노동에 의해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것들은 경험에 속하지 학교교육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커머닝은 법과 국가의 시간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이다. 커머닝은 훨씬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커머닝이 죽었다거나 전근대적이라거나 회고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커머닝은 공식법의 남용을 막는 보루로서 너무도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는데, 이는 커머닝이 공식법이 국민에게 책임을 지도록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식 중 하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공식법은 악인들이 그것을 왜곡할 수 있는 식별가능한 접근점 입법부법원국가수반을 가지기 때문에 더 쉽게 타락할 수 있으며 기만될 수 있지만, 토착법은 민중의 일상과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그리하여 조작하거나 부패시키기 어렵다.

커머너들에게 환영을 받은 마그나카르타였음에도 그에 대한 확약은 끊임없이 경계를 기울일 때에만 보장받을 수 있었다. 커머너들은 의심을 가졌고 반격의 필요성을 이해했다. 이것이 왕들이 몇 년에 걸쳐 마그나카르타를 반복해서 다시 공포하면서 커머너들의 기본권이 실제로 인정되고 있음을 의식(儀式)으로 확언한 하나의 이유이다. 물론 한 장의 종이는 국가권력의 남용을 막는 데 그저 제한적 가치만을 가지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시대에 확인할 수 있었듯이 테러리즘과 싸운다는 미명 하에 미 정부는 인신보호권과 적합한 절차, 고문의 금지 및 마그나카르타의 기타 원리들을 무시해왔고 벌을 받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마그나카르타 역시 토지에 대한 거대하고 새로운 인클로저들을 거의 막지 못했다. 1536년에 헨리 3세는 영주와 귀족에 의한 일련의 광포한 인클로저들을 촉발하면서 가톨릭 수도원을 없애버렸는데, 이는 라인보우가 말하듯이 국가가 후원한 대규모 사유화 작업이었다. 수년간에 걸쳐 4000개의 법령들로 승인받은 떠오르는 젠트리계급이 영국의 전 공유지의 대략 15%를 그들 자신의 사적 사용을 위해 차지했다. 이러한 인클로저들은 수많은 커머너들이 흙과 맺었던 사회적 관계를 파괴했고 그들의 사회적 정체성과 전통을 짓밟았다. 커머너들을 프롤레타리아화하는 길을 닦으면서 말이다.

인클로저가 강화되자 커머닝하는 그들의 옛 방식을 고수하려했던 여성들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는 생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커머닝할 권리를 주장했다은 종종 자신들이 마녀로 비난받는다는 걸 알게 됐다.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는 중세의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그녀의 페미니즘 역사서 캘리번과 마녀에서 이 주제들을 탐구했다. 그녀가 쓰기를 커먼즈의 사회적 기능은 여성에게 특히 중요했는데, 이들은 토지에 대한 소유와 사회적 권력을 덜 가지기에 그들의 생존자율사회성을 위해 커먼즈에 더 많이 의존했던 사람들이었다.”

 

커먼즈법의 쇠퇴

커먼즈 연구가인 르워스 하이드(Lewis Hyde)인클로저의 의미는 지역의 기억 속에 보존되어 있던 관습이 이끌던 삶이 글로 보존되어 있는 국법이 인도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라고 봤다. “그것의 의미는 변화가 한때는 쇠퇴와 연관되어 의심스럽지만 이제는 성장과 연결되어 칭송받게 되었다는, 즉 변화 자체의 가치가 전도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의 의미는 (공장이 시간을 합리화하고 측정하며 그에 기초하여 사람들의 행동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시간의 척도와 시간에 대한 인식에서의 변화였다.”

토지에 대한 민중의 접근권이 사회적 관습과 분리되자 새로운 유형의 인간 즉 분명 집단의 일원이 아니며 그의 세계관이 개별임금기술진보사회진보물질적 이득에로 향하게 된 개인이 나타났다. 칼 폴라니는 새로운 시장질서가 이주하며 방랑하는, 자존감과 기율을 결여하여 거칠고 냉담한 존재인 그런 사람들을 만들었다고 썼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시장질서의 필요에 부응코자 커먼즈를 구성했던 요소들자원들커머너들사회적 관행들을 해체하고 상품화한 것의 귀결이었다.

물론 인클로저에는 영주/커머너 관계를 폐기하고 가신을 자유보유권자로 바꾼 것과 같은 몇몇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자유는 두 가지 상반된 결과를 낳았다. 인클로저가 새로운 정체성과 사회적 자유를 추구하도록 인민을 해방하면서 커먼즈의 사회적 응집도 파괴했던 것이다. 즉 인민의 확실한 생존보장생태적 지속가능성정체성자원사용을 안정적으로 연결시키는 관계를 말이다.

사회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역사는 커먼즈를 해체함으로써 생겨난 몇몇 최악의 구조적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19-20세기의 유럽사회주의는 산업사회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예전 커머너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상호부조와 관료제를 도입했다. 소비자협동사회보장제도지방의 상수도와 같은 상향식 개혁이 창안됐다. 이는 국가/시장이라는 대단히 상이한 역사적 맥락에서 커머너들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개혁들은 분명 자유방임적 질서에 비해 개선된 것이었다. 실제로 다수의 초기 사회주의적유토피아적 기획들이 다소간 커먼즈로 작용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 기획들이 여전히 전통적 커먼즈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간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단체가 국법과 관료제, 기업과 시장의 힘이 요구하는 것에 순응하자 커머닝의 실천 과 커먼즈의 생명력이 시나브로 사라졌다.

국가규제는 자유시장이 낳은 문제들 즉 환경공동체인체에 비용과 위험을 전가하는 걸 보상하기 위한 또 다른 수단이어왔다. 환경 관련 관행을 규제하고 음식의료장비화학물질자동차소비재의 안전을 요구하는 것은 커머너들의 사회윤리규범을 강화하기 위해 공식법과학관료제라는 까다로운 장치를 사용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상업거래의 규모와 다국적 기업의 힘을 생각해보면, 국가규제가 분명 필요하다. 전통적 커먼즈는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결과들을 보증하기에는 너무도 작으며 조직되지 않았고 자원이 부족하다.

다른 한편에서 규제가 그다지 잘 이루어져온 건 아니다. 법의 집중화형식화는 규제되는 산업으로 하여금 규제과정을 더 쉽게 장악하고 부패시키는 걸 가능케 했다. 국가/시장의 힘과 양자가 깊이 연루되어 있는 공동의 이익을 생각하면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거버넌스가 시장이 낳는 만성적인 사회적, 환경적 남용에 재갈을 물릴 수 있도록 어떻게 재구조화될 수 있는지는 일종의 열린 물음으로 남아 있다.

국가규제의 결과가 결코 한결같지 않듯이 공통자산의 수탁자로서의 국가의 역할도 한결같지 않다. 때로 국가의 역할은 참담하기도 하다. 우리는 국가가 관리하는 많은 자원이 인민에 속한다는 사실을 쉽사리 잊는다.

국가는 공기공유지해안지역야생생물을 소유하지않으며 그것들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인민의 관리대행이자 수탁자로 행동하는 것만이 국가에 부여된 권한이다. 공적 신탁론 하에서 국가는 이러한 자원들을 파괴하게 해선 안 된다. 국가의 책무를 강조하고자 나는 국가가 매개하는, 대규모 커먼즈를 국가수탁커먼즈로 부르고 싶다.

불행하게도 종종 국가는 경제성장을 억제하고 널리 믿어지는 자유시장원리라는 허구를 위반할까 두려워 시장에 개입해야하는 의무를 소홀히 한다. 예컨대 안전규제와 공익사업에 대한 요구는 사회를 안정화하고 심각한 위해를 막으며 초보적인 사회적 공정성을 보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시대에는 대다수의 정부가 이러한 목표들조차 자본과 기업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짐이자 경제성장의 덫으로 여긴다.

물론 많은 풀뿌리 운동들이 다소 독립적인 협동조합과 상호조합을 발전시켜왔다. 불행하게도 대안을 제시하는 이러한 시스템들은 의미 있는 규모에 도달하는 데 대체로 실패해왔다. 이와 유사하게 많은 중요한 규제를 통한 보호가 수년 간 이루어졌음에도, 그것이 시장이 낳는 새로운 문제들의 가차 없는 흐름에 필적할 만큼 성공해온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규제가 대체로 법절차주의와 과학지식에 지배적인 영향을 받은 결과 지역주민들이나 개별소비자들의 시각이 의사결정에서 변호사들자격증이 있는 기술전문가들기업임원들의 시각만큼 중시되지 않는다. 커머너들이 거버넌스 과정에 참여하고자 할 때 그들은 종종 탈법적인 사람이 되거나 혹은 그저 참여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실제로 표면상으로는 공정하고 평등하며 보편적인 참여를 보장하고자 했던 바로 그 제도화과정이 커머너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경향 또한 가진다. 사회민주주의국가가 사회안정이라는 기획을 관리해왔을 때, 그리고 국가공산주의가 조합적인 집단자주성을 무시해왔을 때가 그러했다. 커머너들이 국민국가의 법체계를 통해서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자원을 적절히 보호하는 데 성공하는 일이 대단히 이례적이고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한 대단히 명민한 논평자들 중의 일부는 다음과 같은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이다. 더 커머너(The Commoner) 웹사이트의 편집자인 마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 미드나잇 노츠 컬렉티브(Midnight Notes Collective)를 창립한 조지 카펜치스(George Caffentzis), 커먼즈의 페미니즘적 함의에 주목하는 역사가인 실비아 페데리치, 마그나카르타 선언(The Magna Carta Manifesto) 또 다른 영국 커먼즈의 역사를 저술한 피터 라인보우, 정치 이론가이자 다중(Multitude)제국(Empire)공통체(Commonwealth)의 저자인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 이들 각각이 상이한 방식으로 주목해온 것은 고삐 풀린 자본주의시장의 핵심적 문제가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사회적 연계(협동관습전통)를 파괴하고 사회와 개별 커먼즈의 유기적 결합을 손상시키는 경향이라는 점이었다. 자본은 커먼즈를 노동토지자본화폐라는 그것의 구성요소들로 분해하며 이 요소들을 그 가치가 그것들의 가격과 똑같은 상품들로 다룬다.

이것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도덕적정치적 위기를 야기해왔는데, 그것은 시장자본주의가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장교환에 참여하는 데 필수적인 최소한의 사회적 시민적 연대를 넘어 사람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시장 기반 사회가 커먼즈 없이 생존할 수 있을까

Posted by 카오모